좀비 바이러스는 서울을 잠식하고, 로봇은 열반에 이르고, 지구는 당구공과 충돌해 인류는 멸망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영화 '인류멸망보고서'가 들려주는 인류 멸망의 징후들이다.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SF 장르의 영화다.
인류 멸망을 테마로 장르적 색깔이 뚜렷한 세 편의 단편을 모았다. 임필성 감독의 좀비물 '멋진 신세계'로 시작해, 김지운 감독의 로봇물 '천상의 피조물'을 거쳐, 다시 임필성 감독의 종말론 '해피 버스데이'로 막을 닫는다.
멋진 신세계'는 괴상한 바이러스가 출몰하고 그로 인해 좀비가 창궐하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린다.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홀로 남은 석우와 퀸카 소개팅녀는 잘못 버린 썩은 사과 하나로 좀비가 된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 전역을 덮치게 된다.
좀비처럼 변해가는 한국 사회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환경문제부터 한국 정치와 남북 관계, 세계정세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다.
'천상의 피조물'은 불교의 깨달음을 얻은 로봇 이야기다.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피조물은 창조주인 인간에게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이를 인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인간들은 로봇의 해체를 결정한다.
극중 로봇은 묻는다. “나는 무엇입니까?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현학적인 대사가 영화를 무겁게 만들지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만만치 않은 내공의 에피소드다.
'해피 버스데이'는 주문한 당구공이 지구를 향해 오는 소행성이라는 황당한 설정으로 출발한다.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민서네 가족은 삼촌이 만든 지하 방공호로 대피한다. 멸망이라는 공포 속에서도 살아남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말이 와도 희망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충무로에서 SF 영화가 가능할까?라고 묻는 영화는 만듦새가 2%쯤 부족하지만 감독들의 상상력만큼은 흥미롭다. 배우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멋진 신세계'에는 류승범과 고준희가 활기 넘치는 앙상블을 보여주고, '천상의 피조물'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송영창과 김규리 김서형 등의 노련한 연기를 만날 수 있다. '해피 버스데이'는 오타쿠 삼촌으로 등장하는 송새벽의 맛깔 나는 연기와 함께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배두나가 반갑다. 봉준호 감독의 깜짝 출연은 폭소급이다.
인류 멸망이 핵전쟁 쓰나미 같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비롯될 수 있다는 상상은 우리 현실과 가깝게 닿아 있어서 더 섬뜩하다. 박해일이 목소리를 연기한 로봇 스님 '인명'이 던지는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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