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경 서원대 신문사 편집장ㆍ백북스 회원 |
이 소설은 분명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미국 심리 수사물이나,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스토리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판타지를 꿈꾸게 된다. 커다란 사진 한 장이 마음속에 남게 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처'는 인생의 또 다른 숨통을 트여주면서도 벗어난 그 인생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내 인생을 죽일 수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인생은, 바로 내 인생인가?
▲ 더글라스 케네디 저 |
소설의 주인공 벤 브레드포드는 월가의 잘나가는 변호사다. 젊은 시절 사진작가를 꿈꾸지만 여러 현실적인 제약 앞에 굴복하고 대신 비싼 카메라 수집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그런 벤에게 아내의 외도와 이혼 요구로 충격과 배신의 나날을 겪는다. 그리고 내연남인 게리와 대면한 순간의 분노가 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이미 게리는 숨을 쉬고 있지 않으나, 벤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결국 벤은 사라지고 게리는 남았다! 게리의 육체와 함께 벤의 영혼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택의 순간인가. 절묘한 순간, 치밀한 계산 속에 벤은 완벽히 게리가 되어 떠나고, 게리는 완벽히 벤이 되어 죽는다. 그리고 이제 벤은 게리 서머스로 변신. 두 아들의 아버지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기계인 남자에서 매달 신탁기금을 받아 자유롭게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피붙이 하나 없는 혈혈단신 솔로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 보는 일이다. 특히나 내 생활이 불만족스러울 때나 내 인생이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니었을 때,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이제까지의 내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상상 말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부모의 기대를 받는 딸로서, 우애 좋아 보이는 자매로서, 누군가의 선배, 후배로 그리고 한 남자의 애인으로 주말마다, 매 기념일마다 나는 없고 누군가의 누구로 남아 있는 하루. 적어도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생활비 부담이나 나에게 맡겨진 책임들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내 나이 이제 겨우 22살.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여러 사회적 책임과 지위가 따른다. 5년, 10년 후면 지금보다 더 많은 책임을 앉고 살 것이고 그러면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가야금 연주가'는 까마득히 잊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니까.
소설에서 벤은 기나긴 고속 도로 한 복판에서 그의 게리로서의 삶과 벤으로서의 삶을 다시 짚어 돌아나가 본다. 두 삶을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 나는 누구의 삶을 살았을 때 행복했을까.
소설 속 벤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 지칠 때가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어깨를 누르고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포기하지 않는 것들로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느끼는 그 감정들이지만 만약 나에게도 벤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여태까지의 내 삶을 버릴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비록 버거운 순간들로 인해 주저앉아 푸념도 하고 쓸모없는 감정들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일상이라도 그러한 날들의 나, 그런 나조차도 감사하다. 내 삶의 무게는 우리 모두의 무게이기도 하며,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내일이 있어 오늘 하루 또 한 번 희망을 걸어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김재경 서원대 신문사 편집장ㆍ백북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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