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기대가 크면 그 만큼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그 후 그 사업의 성과물이 간행되었다는 소식을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하기야 지리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한정된 것일 테고 그래서 시작할 때도 귀퉁이 소식뿐이었는데, 이제 성과가 나왔다고 한들 언론이 뭐 그리 크게 그 소식을 취급해주었겠는가? 그 성과물을 본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 뒤 지역의 어느 문화원을 우연히 들렀을 때였다. 책꽂이에 그 비슷한 책 몇 권이 한 묶음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혹시가 역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정부에서 하는 일들은 왜 다 그렇고 그런 것들뿐인가? '동국여지승람'과는 애초에 비교할 수가 없고 1970년대에 뿌리깊은나무에서 간행한 '한국의 발견'에도 크게 못 미치는 내용이었다. 그 수상쩍은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동국여지승람'의 위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
“있으렴 부디 갈까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달프다 가는 뜻을 일러라.”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지은 시조다. 이 시조는 성종이 유호인에게 들려준 것이라고 하는데, 유호인은 성종의 어명을 받아 '동국여지승람'의 증보수정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성종은 유호인을 무척 아꼈던 듯하다. 유호인이 칠십 노모를 모시고자 벼슬을 사직하고 집이 있는 경상도 선산으로 돌아가려 했다. 임금에게서 떠나는 것이지 임금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으나 성종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훈구파 세력이 득세한 조정에서 임금은 유호인과 같이 사림에 속한 인물 하나가 아쉬웠던 것이다. 유호인은 사림의 거두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신하를 위하여 전별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이 술에 취하여 이렇게 읊었다고 하니 떠나는 신하도 꽤나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이처럼 이 시조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흐르는 절절하고 흐뭇한 정 때문에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종은 유호인에게 집에서 가까운 합천 군수를 맡겼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도 노모를 봉양할 수 있게끔 배려해준 것이다. 그러나 유호인은 그로부터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느닷없는 병을 만나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그때 또 성종의 애석함이 어떠했겠는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에게는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어디 꼭 선비라고 해서 그렇겠는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말도 또한 가능해진다. “신하는 자신을 인정하는 주군을 위해서는 신명을 바친다.” 또는 이런 말도 성립할 것이다. “부하는 자신을 아껴주는 상사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한다.” '사기'의 '손자오기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위나라 장군 오기는 병사들과 음식도 함께 먹고 옷도 똑같은 것을 입었다. 잠을 잘 때도 병사들과 함께 잤고 행군 중에도 말을 타지 않았다. 매사를 병사들과 똑같이 하는 장군을 부하들은 저절로 존경하게 되었다. 어느 날 병사 하나가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하자 오기가 입으로 직접 고름을 빨아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미가 대성통곡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우는 연유를 묻자 어미가 이렇게 대답했다.
“전에 장군께서 그 애 아비의 종기를 빨아주자 아비는 등을 보이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소. 이번에는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었다고 하니 이 아이도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소. 그래서 통곡을 하는 것이지요.”
“위대한 리더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쉽게 움직인다. 그들은 우리의 열정에 불을 붙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끄집어낸다. 그 거역할 수 없는 힘의 근원을 설명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략이니 비전이니 굳건한 사상이니 하는 것을 들먹이겠지만 그 힘의 실체는 보다 깊은 데 있다. 위대한 리더는 그의 감성을 통해 지도력을 행사한다.” 감성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다니엘 골먼의 책 감성의 리더십에서 찾아낸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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