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선 풀뿌리사람들 상임이사 |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사찰보고서 작성지침은 다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찰 문서 중 '복무동향 점검 보고 양식'에는 보고서를 쓸 때 '단순히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구체적인 해당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상자의 역할에 대해 기술. 본인이 대통령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기술'하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는 이영호 전 비서관이 지원관실의 보고서가 올라오면 민정수석실 보고용과 직보용으로 나눠, 직보용은 직접 위로 보고했다는 그동안의 보도 내용과도 일치한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과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이 2008~2010년 청와대에 145차례나 출입한 것도 밝혀졌다. 권재진 법무장관은 청와대민정수석 재직 시 6차례 직접 보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무총리실 직제상 지원관실의 업무보고는 총리실 사무차장(차관)과 국무총리실장(장관)을 통해 국무총리에게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 전 지원관과 진 전 과장은 청와대 하명사건의 경우 공식 보고라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보고했다. 지원관실은 2009년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서 “청와대가 '특정사안'에 대해 보고를 요구할 경우 그렇게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로부터 자료를 받아 불법을 비호하고 정부에 의해 인권이 유린된 김종익씨 공격에 여당이 앞장서기도 했다. 검찰이 압수한 'KB 강정원 행장 비리관련 보고-김종익 관련' 문건에는 “본건을 권택기 의원에게 통보, 선 의혹제기로 김종익 쪽의 예봉을 꺾고”라고 적혀 있다. 권택기 의원은 그해 9월16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사찰 '몸통' 의혹을 받은 박영준 지식경제부 제2차관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의 국정감사 증인 채택 반대를 주도했다. 조전혁 의원은 지원관실의 진경락 기획총괄과장이 만남을 주선한 납품업체 대표를 통해 대금거래 통장 사본을 받은 뒤 직접 김종익씨 공격에 나섰다. 김무성 당시 원내대표는 비상대책위원ㆍ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좌파 성향의 단체에서 활동해온 사람”이라고 색깔론을 제기했다.
당 소속 의원들이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자료까지 받아가며 '공격 부대'로 직접 나선 셈이다. 전ㆍ현 정권을 동시에 특검하자고 비판하면서 '불법사찰과 당은 무관하다. 우리도 피해자'라고 대응했던 여당의 이중성을 먼저 돌이켜보아야 한다.
불법사찰의 문제는 심각하다. 사찰 보고서는 업무와 관련된 공무원의 비리나 무능을 캐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현 정권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느냐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기강 확립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불법사찰이었다. 더욱이 이런 심각한 불법행위를 덮으려는 축소ㆍ은폐가 자행됐다. 검찰의 경우 이번에 폭로된 문건을 2010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건만 수사하고 덮었다. 그래서 '무관하다'는 청와대의 입장이나 '철저히 재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다짐이 전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통령이 나서 해명해야 한다.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고, 엄격한 재수사를 위해 사건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권재진 법무장관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외면과 무시는 국민적 의혹만 키울 뿐이다.
아울러 정치권은 이번 사안을 선거 쟁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국민의 존엄성을 짓밟고 국기를 문란하게 한 행위를 놓고 무엇을 다툰다는 말인가. 이 사안은 결코 선거의 유불리 차원에서 얄팍하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야 비밀 조직을 통해 수집한 상대방 약점을 가지고 군기를 잡고 반대 세력의 비판의 막으려는 꼼수정치, 불법사찰에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붓는 해괴한 일이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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