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를 만나 교육에 뜻을 품다
▲ 윤경로<사진 오른쪽> 이사장과 오대영 남대전고 교장이 교정을 거닐며 재단과 학교의 발전방향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학교법인 대운학원 남대전고는 1973년 고 송석(松石) 윤홍섭(1914~1997년) 선생이 당시 문교부의 설립 인가를 받아 이듬해 개교했다.
대운(大運)이라는 이름은 1935년 송석 선생이 조치원에 세운 대운상회(大運商會)에서 근원 한다. 대운상회의 돈이라면 세지도 않고 믿었을 만큼 선생은 신용과 근검을 바탕으로 사업에 성공했다.
1945년 해방 후, 우연히 이웃집을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그로부터 민족교육을 권유받고 언젠가는 학교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윤경로 이사장은 “그때 송석 선생이 백범 선생의 말씀에 고마움을 느껴 작은 성의를 표하자, 백범은 남이 장군의 호방한 시를 붓글씨로 써줬고 선생은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고 말했다.
#시대적 사명감으로 학교를 설립하다
대운학원이 설립인가를 받은 1973년은 국가의 경제 개발에 치중한 나머지 교육에 미처 투자할 여력이 부족한 시기였다. 당시 충남의 고등학교 진학 수용 능력은 65%밖에 되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때 송석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사회적인 책임감을 절감하고 학교 설립을 결심했다.
▲ 윤경로 이사장이 직접 수집하거나 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백제시대 유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고교평준화 발판으로 명문고 도약하다
남대전고가 본격적인 발판의 계기를 마련한 때는 설립자의 아들인 2대, 4대(현재) 윤경로 이사장이 진두지휘하면서부터다.
당시 충남도청 자문위원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맡았던 윤 이사장은 대운학원의 전신인 충남자동차교습소 자리를 학교로 변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윤경로 이사장은 “유신정권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동구 대의원을 지냈을 때 정계 입문을 고민했었다. 작고한 이헌구(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동생) 서구청장이 구청장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인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접었단다.
교육사업에 매진하기로 한 윤 이사장은 학생들과 함께 직접 벽돌을 나르고, 필요한 교육시설 증축에 투자하고, 교사의 자질 향상을 위해 대학원 진학을 권장하는 등 교육 경영가로서 면모를 발휘했다.
신설학교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남대전고는 재단의 적극적 지원과 명문고를 향한 교사의 집념, 배우고자 하는 학생의 열의가 합작 되면서 변모하기 시작했다. 첫 신입생의 입학 경쟁률은 3대 1이었다. 법조계에 남대전고 출신이 비교적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입제도가 6회 입학생부터 추첨에 의해 배정받는 고교 평준화로 바뀌면서 발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중부권 최고의 명문 사학이 되다
대전시가의 모습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보문산에 1974년 6학급 360명으로 출발한 남대전고는 1977년에는 한 학년에 12학급 720명으로 성장했다.
이는 당시 대전시내 다른 학교를 압도하는 규모였다.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인문계 고교의 가장 큰 관심사인 대학진학률에서도 대전시를 뛰어넘어 전국적인 명문 고교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서울대 입학성적만을 살펴보면, 1982년부터 6회 26명, 7회 30명, 8회 30명, 9회 24명, 10회 29명이 합격했다. 1985년 학력고사 충남 수석(이형돈, 9회), 1987년 학력고사 전국 차석(이상진, 11회), 1993년 학력고사 대전ㆍ충남 수석(김재철, 20회) 등 중부권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또 대전지역 사립학교 중에서 법조계 진출이 가장 많은 학교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오대영 남대전고 교장은 “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도 학생이 희망하는 한 100%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있어 앞으로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학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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