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다. 당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와서 덕만 공주(선덕여왕)에게 보이니 덕만 공주가 “이 꽃은 향기가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아버지 진평왕이 웃으며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니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그래서 압니다”라고 했다.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 판단력, 예지력을 지녔던 여왕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선덕여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뽑아서 서쪽 근교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적병이 있을 것이다. 덮쳐서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신하들이 왕에게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하니 “개구리가 노한 모습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여성의 생식기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깔은 백색이다. 백색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었음을 알았고,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으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소”라고 했다. 선덕 여왕은 사실 백제군의 매복 사실을 치밀한 정보망을 구축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를 여근곡의 지명과 남녀의 자연 이치를 곧바로 연결해서, 남성들의 과시가 얼마나 허세에 불과한 것인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의 통치력을 단숨에 강화시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신을 낭산의 남쪽 도리천에 장사지내 달라고 당부했다. 그 이후 과연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무덤 아래 세우니, 사람들은 여왕이 도리천 밑에 사왕천이 있는 불국정토 완성을 예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문무왕이 여왕의 신망을 이용해 사천왕사를 그곳에 세웠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사천왕사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을 갖고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사후에도 불국토를 지키는 호국의 신이자 국가 위기극복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인자하고 현명하고 감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서 지혜와 화술, 국제 감각까지 갖추어 당은 물론 일본에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가야계라는 한계 속에서 군사적 실력자로 등장한 김유신도 잠재적인 왕위의 위협자로 낙인찍혔을 법하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최고의 지배층이 되기에는 하자가 있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해 삼국통일의 동량으로 양성했다.
이제 우리에게 여성 CEO, 여성 장관이 이채롭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여야의 최고 지도자도 여성이 되었다. 우리 사회 여성 진출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면 4ㆍ11 총선에서 각 정당이 공천한 여성의 면면이다. 당초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평가가 있지만, 비례대표 공천에서 이주 여성과 노동운동가 등 각계각층에서 여성의 이름이 올랐다. 국민은 지기삼사(智幾三事)와 관인명민(寬仁明敏)의 여성리더십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그것을 지켜보고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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