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정자 한국춤무리 대표 |
몸은 3월 들어 더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어떠한 감흥도, 의욕도 없이 그저 정해진 일정들로 시간을 메워 나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 내가 없기에 밖에서 찾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 내가 없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면서도 그 형체도 없는 마음은 이리도 애를 태우는 건지. 철야기도 프로그램에 참여도 해보고 틈틈이 좌선도 해 보건만 왜 이리 채워지지 않는 건지. 아마도 그건 행복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 짓기의 유, 무라고 하듯이 그 마음 짓기 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나를 잃어버리면 끊임없이 다른 것에 목마르게 됩니다. 나를 되찾으면 될 것을 엉뚱한데 매달려 고통받는 것이죠”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찾아보았다.
사람들은 살면서 몇 번인가는 중요한 선택을 본의에서든, 또는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나머지 삶은 대부분 그 순간의 선택을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을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바쳐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까 한다. 나의 경우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하면서 신명나게 즐거울 수 있는 일은 춤을 통해서, 흙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올해의 슬로건을 춤에, 흙 작업에 미치자였다.
그 미친 작업들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춤에서처럼 한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된다는 확신 속에 뒤늦게 시작한 흙 작업에서도 그 무엇을 느낄 때 가 올 것이라는 희망 아래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이 부유하고 있었던 것은 무언가를 새로이 구상하고 만들어 내 보고의 몸짓이 아닌 단순노동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였던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도자기 공부를 시작한 지 올해로 4년째. 꼭 1년 전 그 누구보다도 서로 좋아 해주는 후배의 주문이 있었던 것이었다. 색상은 흰색이 좋고 무겁지 않고 가벼워야 하며 네모진 것은 싫고 둥근 원의 형태가 좋고 질감은 등등의 요구와 함께 자신의 식탁을 채워 줄 상차림 도자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내 기량이 안 되어서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선 지금은 해 줄 수 있을 만큼 자신도 붙었고 마침 작업실도 따로이 가졌고 해서 기념의 첫 작업으로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선의의 약속이 나를 이렇게 옭맬 줄이야….
어느 궤도에 올라와 있는 도공이라면 그 정도의 작업쯤이야 후다닥 하루 이틀에 해치우고 말겠지만, 아직 그 수준은 안 되기에 춤추고 남는 시간 1월, 2월을 바쳐 놓고도 아직 미완성이다.
아니 그것 까지는 괜찮다. 그 시간이 충분히 즐거웠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이 아닌 후배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물을 만드는 그 시간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우울하게, 부유하게 만들고 있었음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제 신명에 의해, 제 의지에 의해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작업시간을 보내야 신이 나는 나 인 것 을 말이다. 하여 과감히 엎기로 했다. 그리고 내 것을 던져 주려 한다.
그만큼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후배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의 작품을 던져 주려면. 그 점이 스스로 선택한 아티스트의 고민일 테고 살맛 나는 고민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후배와 내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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