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대사에선 회한이 묻어난다. 왕후를 비명에 잃고 나라는 벼랑에 놓였는데, 자신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야 하는 처지이니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가비'는 아관파천 시기를 배경으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와 그녀를 사랑하는 이중간첩 일리치가 고종을 암살하려는 일본 사다코의 모략이 이용되는 과정을 긴박하게 그려낸다.
볼거리가 풍성하다. 러시아 르네상스 문물을 재현한 앤티크(Antique)한 세트는 꽤 인상적이다. 꼼꼼히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세트들은 그 자체로 스토리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세트엔 조선인이, 지극히 한국적인 조선 왕궁엔 서양인이 등장하는데,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당시의 혼돈을 표현한 것. 이색적인 커피 소품들은 극장 안을 커피향으로 채워 놓는다.
조선 러시아 일본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의상도 눈길을 끈다. 따냐 역의 김소연은 러시아 시절엔 붉은 머리에 보헤미안 스타일로 당당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조선에선 단정한 블라우스와 하이웨스트 스커트로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황군제복부터 세련된 정장, 패도라 등으로 치장한 일리치 역의 주진모는 당장 런웨이에 세워도 어울릴 정도다. 조국을 버리고 일본인이 된 사다코 역시 화려한 기모노 등으로 매력을 발산한다.
무엇보다 극을 이끌어가는 4명 배우들의 연기가 볼거리다. 주진모의 깎은 듯한 얼굴선과 강렬한 눈빛은 '순정 마초'와 잘 어울리고, 박희순은 카리스마와 절제를 적절한 수준에서 오가며 강인한 고종을 그려낸다. 모략의 설계자인 사다코 유선의 연기도 안정적이지만, 단연 압권은 김소연이다.
김소연은 따냐의 복합적인 감정을 손에 쥘 듯 표현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 고종의 진면목을 발견하며, 조국에 대한 반감을 버리고 점점 애국심을 품게 되는 과정을 과하지 않은 연기로 담아낸다. 일리치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 증오에서 연민과 존경으로 변해가는 고종을 향한 눈빛은, 19세기 말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에 주목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난다.
허나 구슬도 꿰어야 보배. 화려한 볼거리들은 극의 진행에 녹아들지 못하고 따로따로 겉돈다. 너무나 많은 볼거리,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떠안고는 설명은 해주지 않는 드라마의 불친절함 탓에 그냥 눈만 즐겁다. 정서적 울림도, 재미도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하락세다.
따냐 일리치 사다코 모두 조국 조선을 버리고 다른 나라 사람이 된 이방인들이다. 조국에 대한 이들의 애증, 또 일리치의 일편단심 따냐와 따냐가 향하는 고종의 삼각관계, 혹은 사다코까지 포함해 4각 관계를 밀도 있게 그려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아쉬움이다. '접속'과 '텔 미 썸딩'을 만들었던 장윤현 감독이기에 더 아쉽다. 그림을 제대로 보기엔 병풍이 너무 화려했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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