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대전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의거인 '3ㆍ8민주의거'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사진제공=(사)3ㆍ8민주의거기념사업회] |
1960년 3월 9일자 본보 3면에 보도된 '비화된 학생데모' 제목의 '3ㆍ8민주의거' 기사의 첫 문장이다.
52년 전 대전고 2학년 학생 1000여 명이 거리에 뛰쳐 나와 '교내에서 선거운동 반대', '외부세력의 학원침투 방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사건은 지역을 넘어 전국에 큰 파장을 낳았다.
당시는 여당을 찬양하는 정부신문을 학급비로 강제구독하고 수업시간에는 이승만 박사의 미국망명시절 연설을 들어야 했으며 학교 밖에선 고무신과 막걸리, 돈봉투가 춤추는 부정선거가 절정이던 시기였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독재가 절정에 달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급급한 상황속에서 저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등학생 신분으로 거리로 뛰쳐 나와 의거를 일으킨 것은 당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대전천 제방으로 향해가던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로 제방 근처에서 대열이 흩어지고 일시 아수라장을 이룬 후 다시 대열을 갖추어 중교다리를 건너 역전을 돌아 도청으로 향해 달려가다가 목척교를 건너기 직전 경찰백차에 전도가 차단됐다.”
당시 본보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사태를 이렇게 긴박하게 전했다.
이틀 후에는 대전상업고등학교에서 오전 조회를 마치고 전교생 600명이 교문 밖으로 뛰쳐 나와 신안동 굴다리를 거쳐 역전통을 향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1960년 3월 11일자 3면에는 “학생대열은 역전통과 중앙시장통으로 갈려졌으나 제지되고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다”고 보도했다. 또 “대전공업고등학교와 보문고에서는 교원 수명이 교문을 지키며 다른 학교 학생들의 접근을 막았다”며 당시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전했다.
대전지역의 학생의거는 대구 2ㆍ28민주화운동 이후 첫 학생시위였으며, 다른 지역으로 번져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 충남도경에서는 정치세력의 지령으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고 몰아갔다. 그러면서 충남도경은 연행된 학생 모두 귀가조치 처분을 받아 어떠한 배후관계도 없다는 앞뒤가 안맞는 발표를 했다.
이후 4ㆍ19혁명이 촉발되고 같은달 26일 충남도청 앞에서 충남대ㆍ대전대, 남녀 중고등학생 1000여 명이 모여 '쓰러진 국민주권 정의로서 인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과정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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