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기 대전대 교수·정치학 |
어릴 적에 두꺼비 집을 짓는 흙장난을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본 노래일 것이다. 있지도 않은 두꺼비에게 헌집을 줄테니 새집을 달라고 고사리 손을 모아 두꺼비 집을 지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새로 만드는 새집도 헌집과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새집을 지으면서 헌집을 준다고 했다. 아무래도 헌집보다는 새집이 나을 듯해서 일 것이고, 또 헌집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마음에 안드는 것을 버리고 새집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요즘 각 정당이 새집 짓기에 여념이 없다. 당명을 바꾸고 통합을 하기도 하고 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선거연대의 이야기도 솔솔 나오고 있다. 이제 40여 일 밖에 남지 않은 19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은 유권자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위기감 때문인지 과거 선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과거의 헌집과 같은 이미지로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각 정당들이 보여주는 새집 짓기의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그리 신통치 않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집을 짓는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새로 짓는 집이 새집이 아닌 헌집을 그냥 보수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치는 변해야 한다는 것이 거의 진실에 가깝다는 말을 한다. 늘 정치는 변해야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국민의 민심을 읽고 민심에 따라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유권자는 외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는 변해야 하는 것인데, 요즘 정치는 변하겠다고 공언을 해 놓고도 그리 크게 변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정치가 변하려면 외형이나 인물만 변해서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변하려면 보다 근본적인 것부터 크게 바꿔야 한다.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는 특히 우리사회가 지니고 있는 현실과 현상을 감안하면 정치권력의 본질이 변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인물을 바꾸고 정책을 바꾼다고 해서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몇몇의 정치인이 바뀌고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다고 정치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되려면 정치권력의 구조와 내용과 형태가 변화되어야 하고, 정치권력의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새로운 바람이 분다고 해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정치권은 목전에 닥친 총선을 앞두고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노력보다 단지 총선의 승리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정당의 변화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총선의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이번 총선의 느낌은 과거 역대 총선보다 오히려 정치발전이 더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나마 선거철이 되면 나왔던 정책도 뚜렷한 것이 없다. 오로지 현 정부에 대한 심판을 하고 정권을 바꾸자는 목소리만이 높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 조차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을 선거 전략의 기본 틀로 설정해 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해서는 선거를 통한 소위 '선거혁명'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다. 적어도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나타난 민심이 반영될 정치구조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권자의 판단이나 결정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아직은 침묵하고 지켜보는 유권자가 대부분이지만, 막상 선거를 통해 유권자는 의미 있는 판단과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치권과 유권자의 엇박자가 선거를 통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유권자에게 선택만을 강요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하고, 또 유권자가 더 이상 선택의 강요에 따라 결정만을 하는 시대는 아니라는 점도 우리 정치권이 바로 인식해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어릴 적 흙장난을 하면서 불렀던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가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새집을 가져다 줄 두꺼비는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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