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은 지역민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거리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충청권을 관할하는 감사원 대전사무소가 서구 둔산동 정부대전청사 건물 내 자리잡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감사원도 이 같은 현주소를 감안, 최근 들어 공직감찰을 넘어 국민과 기업 속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감사원 대전사무소 산하 국민·기업불편 신고센터는 지난 11일 개소 3주년을 맞기까지 이에 부응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3036건의 개인 및 기업 민원접수 사항 중 2983건을 처리했고, 현재 53건을 처리중이다. 이 중심에는 올해 말 공로연수와 함께 25년간의 감사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나제방 <사진>대전사무소장이 자리잡고 있다. 나 소장을 만나,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감사원 생활의 소회와 일상, 대전사무소의 발자취 등을 자세히 들어보았다.
▲ 사진=이민희 기자 |
나 소장은 1953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나씨 집성촌에서 자랐다. 백산중을 졸업하던 해 가을, 농사일을 돕던 그는 무작정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장롱 속 아버지 쌈지에서 열차비만 꺼내 떠난 그가 맞닥뜨린 곳은 바로 서울의 금호동 꼭대기에 위치한 천막촌 일대 공장이었다.
모험에 가까운 승부수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 홀로 떠난 이유는 뭔가요.
“사춘기 시절 방황이라고 보긴 그렇고요. 그냥 막연히 시골에서 탈출하고 싶었죠.(웃음)”
-첫 서울 생활은 어떠셨는지.
“천막촌 인근의 공장에 다녔는데, 집에 수도가 없어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나르고 여성용 액세서리 가공 일을 맡았죠. 월급은 당연히 없었고, 숙식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전상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죠.
“길을 가다 우연히 1만5000원이면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다는 광고문을 봤고,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보냈죠. 결국 찾아오신 아버지의 도움으로 2개월간 독서실 독학으로 덕수상고에 입학했지만, 자퇴를 택하며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기를 보냈죠.”
-결국 감사원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됐는데, 서울 상경 후 스토리를 말씀해주신다면.
“이후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3개월 만에 고졸 학력검정고시에 합격했죠. 자랑은 아니고요, 아마 이례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이후 한성대 야간부 졸업 후 세무서에 잠시 다니다, 현재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결혼 약속과 함께 사표를 냈죠. 외무고시에 도전하다 1986년 감사직 공채로 첫 발을 내딛게 됐어요. 그리고 지난 25년간 감사원 특별조사본부 감찰정보팀과 사회문화감사국, 광주센터장 등 각 부서를 두루 거치며 작년 9월부터 대전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감사원을 다시 말하다
감사직은 공직자 비리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동창회, 지역사회 인사들과 모임 등에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직업적 특성을 지녔다 한다.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기에 매일매일 자기성찰도 필요한데 풀 곳은 마땅치 않고, 그래서 직원들간 소회를 달래는 모임이 더 많다고 한다.
-감사원, 이름 석자 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사실 그렇죠. 관련법 상 국가 및 공공기관의 세입·세출 결산검사와 행정기관 사무 및 공무원 직무감찰을 수행하는 기관이니까, 좀 무시무시(?)하죠.”
-소위 국민들은 민원이 생기면 국민권익위와 신문고 등을 찾는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감사원도 그런 기능을 갖고 있는 줄 몰랐네요.
“감사원 고충민원은 본질적으로 대상 기관에 대한 감사권 행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죠. 한 마디로 더욱 권위있고 신뢰성있는… (더 나아가)보다 강력한(?) 민원처리가 가능하다는 얘기죠(웃음). 이를 아는 사람은 다 알죠, 기대도 크고요.”
-공직감찰을 하다보면, 검은 손과 지연·학연 등의 관계로 고뇌할 수밖에 없을텐데.
“같은 공직자들도 감사원에 거리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죠. 그래서 참 외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지만 80년대만 해도 사생활이 거의 없었어요. 동창회에도 발을 끊게되고… 지역사회 인사들과도 가급적 연을 안 맺으려합니다. 그게 숙명이죠(웃음).”
▲ 1976년 6월 군생활 병장 시절<사진 오른쪽>. |
“감사원 생활은 늘 긴장의 연속이기에 매우 힘든게 사실이죠. 제5국에서 근무할 당시 상사와의 갈등에다 작은 아이의 방황, 어머니와 아내의 건강악화 등이 겹쳤을 때였던 것 같네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계기라 생각하면 지금으로선 참 다행이죠.”
-화제를 돌려서 일반에 소개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에피소드는 참 많죠.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일을 소개하면, 한때 병무청 감사시 주민등록등본 변조로 현역 입영 대상자를 민방위처분한 사건이 있었죠. 아버지를 행방불명처리한거죠. 이를 확인한 당일 담당 공무원이 밤늦게 케이크를 사들고 찾아왔는데, 인간적 고뇌가 밀려오더라고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주고 받았지만…. 훗날 이 직원은 해임처벌을 받게 됐죠. 심적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보람을 느낀 적도 많았을텐데요.
“2005년 공공기록물 보존 및 관리실태 성과감사를 통해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낸 점이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대통령기록물 관리가 보다 체계화됐고, 새 국새도 제작됐고요. 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재 현충원) 내 장군 묘역 기단은 화강암인데, 애국자 묘역은 시멘트인 점을 지적해 변경조치한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인 것 같습니다.”
#나제방 소장의 꿈과 미래
-감사직 수행을 하다보니 원만한 가족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었을텐데요.
“그랬죠.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워낙 외근과 야근도 많고 그러니 가장으로서 보다 많은 정을 아내와 2명의 아들에게 베풀지 못한 적이 많았죠. 그래도 아이들이 제 갈 길을 잘 찾아서 가고 있고, 최근에는 점수 좀 따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립한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나름 있으실 것 같은데요.
“평소 일상에서는 '내일 사표를 내더라도 오늘 최선을 다하자'로, 항상 평상심을 잃지않으려 노력합니다. 최근에는 '내 허락이 없는 한 누구도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란 자기암시를 많이 하고 있죠.”
-일상생활 중 스트레스 해소나 자기계발을 소개해 주신다면.
“아침7시 수영을 통해 일과를 시작합니다. 주말에는 한밭수목원 또는 대전둘레산길 등에서 산책을 하거나 독서를 하고, 고전음악을 듣고요.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은근한 재미를 가져다주죠. 우암사적공원과 동춘당, 돈암서원(논산), 뿌리공원 등 문화유적지도 짧은 기간 참 많이 다녔네요.”
-지난해 9월 대전사무소장 부임 이후 대전생활의 소회를 간략하게 말씀해주실까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고향이 대전이라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평소 가족과 떨어져 있다보니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도 되고 있고요. 이제는 혼자서도 밥과 김치찌개는 그런대로 할 줄 알아요. 단지 밥짓기와 세탁, 설거지, 분리수거, 다림질 등 가사일이 만만치않음을 깨달을 땐, 아내가 대단해 보이더라고요.(웃음)”
-올해가 공직생활 마무리 시점이라 들었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소개해주신다면.
“대과없는 마무리를 하고 싶죠. 은퇴 후에는 다소 생뚱맞아 보이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길을 제시하는 사상을 정립해보고 싶어요. 책을 1000권 정도 더 읽어서 실천에 옮기고 싶어요. 소설과 시집도 발간하고, 가족과 여행도 떠나고도 싶고요.”
-끝으로 지역민과 후배 공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지역민에게는 공공기관이 부당한 업무처리를 했을 경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최선을 다해 공정히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감사원을 많이 애용해주세요. 대전사무소는 항상 열려있습니다. 후배들에게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대담=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 ·정리=이희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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