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길 충남대 경영학부 교수 |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자식들은 공부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와 다른 형제들의 희생을 딛고 성공한 장남은 후에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거나 어려운 형편에 있는 동생들을 보살피곤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최근 재벌들의 행태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거세다. 재벌 3·4세 등이 빵집이나 커피 전문점, 라면 가게와 비빔밥 장사, 심지어는 순대장사까지 손을 뻗쳐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연구·개발과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외국 자동차, 해외 명품 등을 수입해 국내에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이마트·롯데마트 등은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만들어 골목상권을 위축시키고 지역경제를 고사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탐욕스런 재벌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서 이들은 가진 자로서 최소한의 양식과 염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도를 넘어서고 있고, 1%에 대한 99%의 저항이 거세게 일고 있는 이때 재벌들의 무분별한 행태는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올해 예정된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재벌해체론'과 같은 극약 처방이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임을 재벌들은 자각해야 한다.
재벌이란 무엇인가? 먹고 살기 힘든 1960~70년대 우리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파이를 키우는 것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정부와 국민들이 희생하면서 부족한 자원을 몰아주어 형성된 것이 재벌이라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다. 국제무대에서 경쟁하는데 필요한 '규모의 경제'라는 무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 재벌이다.
재벌을 키우기 위해 정부는 각종 특혜 금융과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낮은 임금과 세계 최장의 노동 시간을 묵묵히 버텨냈다. 수입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해 걸음마 단계인 국내 산업을 보호해 주었다. 국민들은 비록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국산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구매해 주었다. 자동차가 그렇고 전자제품이 그러했다. 이처럼 국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삼성과 현대와 같은 재벌이 탄생한 것이다. MB 정부 들어서는 각종 규제완화와 저금리·고환율 정책으로 재벌에 날개까지 달아주었다.
그런데 지금 재벌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무엇인가? 가족들이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 공부시켜 주었더니 고향에 돌아와 동생들의 생업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족들의 숭고한 희생을 파렴치한 배반으로 갚는 격이다. 국민들이 재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국내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업들과 경쟁하라는 것이다. 대규모 투자와 최고 수준의 R&D 역량이 필요한 분야에서 초일류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혼자만 잘 살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성장의 과실을 중소기업과 함께 나누어 '상생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다보스 포럼에서 조차 작금의 자본주의를 반성하면서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되려면 이제는 성장 보다는 분배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의 지도층이면 그에 걸맞은 품격이 있어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우리나라 재벌은 스스로의 노력보다도 국민들의 땀과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커다란 사회적 책무가 따른다. 기업이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과 불굴의 개척정신을 생명으로 한다. 겨우 골목상권이나 넘보거나 해외명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재벌은 하찮은 장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 재벌의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기대한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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