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당시 대전과 공주는 충남도라는 하나의 공간 또는 행정상의 구역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대전 거주 작가가 공주권에서, 공주 작가들이 대전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공동작업 현상의 밑거름이 된 것은 임동식이 주도한 '금강현대미술제'의 1980년 공주전과 1981년 대전전이었고 '금강현대미술제'의 전위적 움직임은 '야투'의 태동을 촉진하는 전환점이 된다.
여기서 공주와 대전의 통합적 교류에 의한 지정학적 공간구조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후 행정구역이 충남과 대전으로 나뉘면서 미술 역시 이분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 금강현대미술제 영향권에 있었던 공주와 대전 그리고 야투 창립으로 이어지는 흐름표인데, 1980년대 중, 후반에서 90년까지 임동식이 창시한 야투의 정신성은 대전미술의 탈평면화에 확산을 가져와 공주 작가들과 대전 작가들간의 밀접함과 독특한 소통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임동식의 공주 출현 배경
▲ 임동식의 'AH AH AH<왼쪽>', 캔버스 위에 유화, 98×98, 1977, '어느 소년의 꿈을 위한 작업', 1975, 알모양 30개 안면도 꽃지 해변. |
이순구(당시 부여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는 1977년 한국미술 청년작가회 6회전 발표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임동식이 서울에서 운영했던 화실 제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임동식은 이순구의 고등학교 교장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구가 자신의 서울 개인전에 올라와 볼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일이 있었다.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사무실이 인사동 근처에 있었어요. 지금은 덕원갤러리 밑에 2층 이었는데… 그런데 거기서 한국미술 청년작가들이 교체해가면서 전시를 했었던 적이 있었죠. 그때 임동식 선생님 개인전 할 때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미술청년작가전이 개최된 게 1977년 11월이니까 임동식 선생님 개인전도 같은 해에 열렸었어요.
어떻게 가게 되었느냐 하면 임동식 선생님이 저희 교장 선생님한테 편지를 보내서 제가 평일 날 서울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허락받을 수 있게 해 주신 거죠. 그래서 교복입고 모자 쓰고 서울로 갔어요.”라고 이순구씨는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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