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석희 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백북스 회원 |
생소한 제목 '키치'로 시작하는 이 책은 분명 예술사 책이다. 구석기부터 현대에까지 이르는 인류가 만든 문화구조물의 역사에 대한 설명서다. 하지만, 이 책은 기존의 예술사책과는 확연히 다른 특색을 지닌다. 우선, 그림이나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이야기 중심이 아니라, 구석기 시대, 그리스 시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우리 선조들의 사고가 어떻게 예술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이제 신석기와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관은 어떻게 변해왔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기의 예술 형태와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들이 소개되고 있다. 나와 우주, 우리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신념과 알 수 없다는 신념의 대립이 인류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는 것, 이것을 저자는 '지성의 통합과 해체'의 반복이라고 설명한다. 문장들이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집중하기가 힘든 것은 오롯이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나의 무지 때문이리라. 따라서, 누군가에게 그림이나 조각품에 대한 사진과 정보가 필요하다면, 이 책은 그 목적에 합당하지 않다, 다른 그림책들을 선택하시길. 그러나, 만일 '나 자신도 모르는 나'를 만나고 싶다면, 자아의 진정한 깊이를 맛보고 싶다면, 단연코 이 책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 조중걸 저 |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현대 예술 사조의 다양성을 예술가들의 독특함, 개성, 또는 새로운 시도, 유행을 선도하고 싶어하는 욕심으로 설명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재현할 수 없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들에게, 키치와 부단히 맞서 싸워 온 그들에게, 이것은 어쩌면 모욕스런 평가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는 비전문가라는 핑계로 모면해 보지만, 책을 읽는 동안 느끼는 이 화끈거림은 무엇이고, 또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이제 키치는 예술에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양식에도 널리 퍼지고 있는데, 최근 '바나나우유'라는 제품이 '바나나맛 우유'로 바뀐 것을 보면 일상 속에서의 키치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된다. 둘러보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가짜이고 키치다. 알고 보니 키치는 역겹다. 진짜행세를 하는 가짜이기에, 실제 가치가 아닌 허위이기에, 제가 아닌 젯밥에 가치를 더 두기에 구역질나고 끔찍하다.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이고,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허영과 탐욕, 허위의식, 위선, 자기기만이 모두 키치일진데, 어떻게 해야 우리는 키치를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쯤되면 예술사라는 학문으로 시작해서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좋은 책은 어렵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난해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여러 번 곱씹어야 하고, 읽을 때마다 알고 느끼게 되는 부분이 새롭다. 여러 번 읽고 나서야 표지 그림이 왜 뭉크의 절규로 선택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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