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들은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보부상들처럼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그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특히 황씨와 김씨는 매년 대보름날 엿장수들이 실컷 먹고 놀게 해주었다. 그 고마움에 엿장수들은 보답하고자 더욱 열심히 엿을 팔아 주었고 사사로운 일에도 앞장서 도와주었다. 이러한 황씨와 김씨 그리고 엿장수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나아가서 전국의 엿장수들이 '서정말'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이 '서정말'은 엿으로 유명해졌다.
엿이 유명해지자 사이좋던 황씨와 김씨는 경쟁 상대가 되어 차츰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엿장수들도 그 주인을 따라 두패로 갈라졌다. '서정말'로 유명하던 엿도 '황씨네엿' '김씨네엿'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황가엿' '김가엿'으로 서로 비방하면서 인기까지 떨어지고 엿도가도 몰락해 가기 시작했다. 이 때 낯선 사람이 김씨네 엿도가에 나타나 큰 돈을 내놓고 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김씨는 왜국에 가서 기술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김씨가 가르쳐 준 엿만드는 기술을 바탕으로 왜놈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들의 식량을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김씨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고향에 돌아왔으나, 누구 하나 그를 반겨주는 이가 없었으며, 단지 황씨는 죽고 황씨 후손들이 엿도가를 하고 있었다.
김씨도 자신의 옛날자리에서 엿도가를 다시 시작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김씨는 매년 보름날 황씨가 왜놈의 칼에 맞아 죽은 자리에서 거리제를 지내 주었다. 김씨는 유언으로 이 거리제를 영원토록 지내라고 후손에 부탁했다. 사이가 나빴던 황씨 후손들도 결국에는 이 거리제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두 집 엿장수들도 화해의 뜻으로 엿가락처럼 생긴 동아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했다. 그런데 매년 이기는 편 엿은 잘 팔리고 지는 편 엿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줄다리기를 열심히 하다가도 제자리로 되돌려 비기도록 했다. 그런 다음 모두가 하나가 되어 엿 타령과 가위치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그런 다음부터 엿이 더 잘 팔리게 되었고 엿 이름도 두 집의 이름을 따서 '황금태'라는 상표로 일본에 수출되었고 일본의 구주지방의 '조선태'의 원조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동찬·국립중앙과학관 고객창출협력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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