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화 편집부장·온라인뉴스팀장 |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는데다 1월에 설이 있다 보니 연말지출을 의식한 소비자들이 복고형 저가 상품을 선택하면서 대형마트 설 선물 매장에서는 양말과 통조림 세트 같은 제품들이 잘 팔린다는 것. 반면 백화점에서는 초고가 사치품이 불티나게 팔리며 재고가 부족할 정도다. 이른바 '소비 양극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데 그중에는 벨루가 캐비어(철갑상어알)와 푸아그라(거위간), 트뤼프(송로버섯)로 구성된 '세계 3대 진미세트'(59만원)도 들어있다고 하니,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도 든다.
1960년대 어려웠던 시절에는 '설탕'도 버젓한 설 선물이었다. 1970년대에는 조미료와 커피, 식용유, 비누가 집집에 선물로 전해지며 인기를 모았고 1980년대 들어서야 '갈비'와 '과일'같은 식품세트들이 많이 오갔던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선물은 어린 시절 외삼촌이 사다주시던 '종합선물세트'. 커다란 상자에 웨하스부터 캐러멜까지 오색찬란한 과자들이 빼곡히 들어있던 말 그대로 '보물세트'. 그것 하나면, 요즘 말로 '짱'이요 더없는 '호사'였다.
하기사 과자 뿐이랴. 설은 설 자체로 도시 아이에게는 '추억의 종합세트'다.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좁은 골목길,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인 한옥들, 논과 밭, 그 옆으로 흐르던 냇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던 아이들. 밤새워 윷놀이를 하며 사촌들과 뒹굴던 좁은 사랑방.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 말씀에 잠에 빠지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던 추억이며 설날 아침 설빔에 두둑한 세뱃돈까지.
추억은 '따뜻한 난로'와 같기에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때 그 추억'은 '고단한 오늘'을 이겨내게 하는 따뜻한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설의 추억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윷놀이며 제기차기, 연 날리기는 테마파크에서나 즐기는 '이벤트'일 뿐. 요즘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시골 할머니댁에서 뒹굴던 생생한 추억도, 신명나는 놀이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며, 학원에서 조차 쉬는 시간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고 한다. 떠드는 대신 스마트폰을 하느라 쉬는 시간에 조차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 그렇다고 우리 집 내 아이만 혼자서 놀게 할 수도 없다. 모두가 학원에 가기에 함께 놀 친구조차도 없는 아이들.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 박기보다는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더 익숙한 아이들. 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기 보다 모니터 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데 더 익숙한 아이들.
요즘 아이들,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결국 그런 아이들을 만든 것은 어른들의 탓이 아닐까 싶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추억'이라고 한다. 이번 설만이라도 '기억'보다는 '추억'을, 머리보다 가슴에 남겨줄 수 있는 그런 날들은 어떨지…. 설에도 공부하느라 내려오지 못한다는 예비 고3 친척을 생각하며, 백일몽 같은 꿈을 꾸어본다.
끝으로 그 때 그 시절, 그 때를 추억하며,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씨의 아름다운 글 하나를 소개해본다.
설날이 되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설날이 되기 이틀이나 사흘 전에 연중행사인 목욕을 하는 일이었지요. 어머니는 가마솥에 물을 데우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물 온도가 적당하게 맞춰진 큰 대야에 들어가 조금 있으면 때가 불어납니다.
어머니는 “까마귀가 할아버지, 하겠다!”며 등을 때려가며 때를 밀어 냅니다. 작은 돌멩이로 발뒤꿈치 때까지 다 벗기고 나면, 새 물로 온 몸을 헹궈 주시지요.
수건으로 대충 닦은 뒤 내가 “아이 추워!”하며 안방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갈 때까지 어머니는 눈을 떼지 않고 넌지시 웃고 계십니다. 꽁꽁 추운 설날 오후, 아버지께서 개울 건너 어르신 댁에 세배를 가십니다. 마침 냇가에서 씽씽 썰매 타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씩 웃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 웃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했는지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웃음만은 더 선명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웃음으로 남는가 봅니다. 많이 웃는 설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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