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효순 미술사학박사·미술평론가ㆍ한남대 겸임교수 |
눈이 오는 날, 거리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을 보니 그들에겐 우울한 그늘이 없다.
하얀 눈이 살살 얼굴을 어루만지며 간질이니 온화해지고 고개를 숙이니 겸손해진다. 아이나 어른이나 동심이 되어 순수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보리밭이 이불을 덮는다 하여 눈을 '보리 이불'이라고도 불렀고,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 하여 모두들 좋아했다. 특히 눈 속에서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동물을 해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속설을 믿어 먹이를 주고 돌려보내는 미덕을 갖기도 하였다.
우리가 성산이라 부르는 백두산도 산 머리에 항상 눈이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눈은 모두의 마음속에 순결한 이미지를 갖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시인이나 화가들은 눈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눈이라는 차가운 결정체가 화면에 나타날 때 이상하게도 그 속에는 따뜻하고 그윽한 정감이 느껴진다.
서양화가들이 남긴 설경은 흰 눈일지라도 화이트 물감을 사용하여 하얀 눈을 표현하지만, 동양의 수묵화에서는 흰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어야 눈이 되기 때문에 눈이 될 부분을 남겨놓고 대신 다른 부분을 살짝 칠해주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때 칠해진 검은 부분에 의하여 흰 눈이 살아나기 때문에 동양의 설경에는 동양사상이 존재한다. 즉, 가해진 유(有)의 부분보다 비워둔 무(無)의 부분이 결과적으로는 그림의 주제를 이루게 된다. 검은 부분 때문에 흰 부분이 살아나면서 설경(雪景)의 완성을 보게 되니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노자의 도덕경이 실현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배울 여지가 많은 철학을 담고 있다.
'도는 빈 그릇이다', '마음을 비웠다'는 구절은 특히 정치인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했다. 비워야 산다는 원리를 우리는 그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설경의 원리 속에는 극단 같아 보이는 흑백의 상호 조화, 유와 무의 상호원리를 깨우쳐가는 논리도 들어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무를 기초로 해서 유를 본다는 개념으로 그 자신은 나타내지 않으면서 드러나게 되는 원리다. 흑에 의해 백이 살고, 백에 의해 흑이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상생의 관계를 일깨워 준다.
최근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것도 젊은 층과 장년층으로 구분하여 양극화 현상을 만들어 내며 쉽게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젊은 보수층이라도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매도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보수 속에도 진보성향이 있고 진보 속에도 보수성향이 있으니 흑백의 논리로 사람의 성향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굳이 양극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설경그림의 원리처럼 흑이 백을 살리고 백은 흑의 존재감을 살리는 상호의존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인생의 길이를 80조각으로 볼 때, 1년이라는 여백이 차지하는 부분은 길이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80개 삶의 조각이 이어져 채워졌을 때, 숨통을 조일 만큼 빽빽한 면으로 이어져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삶에 적당한 여백을 두며 상호 균형 관계로 완성된다면 아마 우리 삶은 아름다울 것이다.
임진년의 새해가 밝았다.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여백에 어떤 점을 찍어나갈 것인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무늬도 달라질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