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 |
잘 알려진 대로 서동설화의 주인공은 무왕으로 '서동요'도 짓고 미륵사도 창건했다는 것이 철통같은 통설이었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금제사리봉안기'에 그 창건 연대가 '기해년(己亥年)'이라 명기되니 무왕 40년이 '기해년'임을 근거로 해서 무왕설은 사계 여러 학자들의 중첩된 논증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무왕설이 기해년(639)으로 고정될 때, 백제의 문화사는 무령왕대나 동성왕대까지 적어도 120년 내지 140년이나 소급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문제점으로 도사리고 있었던 터다.
이런 시점에서 일찍이 미륵사의 무왕창건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역사스페셜'에서 이같은 보도를 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단 그 주인공이 무왕이라는 통설의 철통같은 아성을 객관적인 근거로 벗어나면서 그 동성왕설과 무령왕설을 그간의 논저와 그 주장자와의 면담을 통하여 핵심적으로 논의하였다.
먼저 그 주인공이 무령왕이라는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삼국유사의 그 원전 '무왕(武王)'조의 주기에 이 설화의 '고본(원본)'에는 그 주인공이 '무강왕(武康王)'이었다는 기사를 주목하여 그가 곧 백제 25대 무령왕이라고 주장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금제사리봉안기'의 '기해년'이 바로 무령왕 19년(519)이라고 논증한 것을 보증하였다. 그러면서 무령왕대의 찬연한 문화를 그 능에서 출토된 문물을 통해 설명하면서 바로 그 주인공이 무령왕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놓았다.
다음 그 주인공이 동성왕이라는 견해를 자세히 소개하였다. 동성왕이 웅진왕도의 남방 익산 내지 탐라 등지를 부속시키려 병력을 동원했다는 사실과 공주 왕성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문양과 익산 왕궁리 왕궁탑 주변에서 수습된 그것이 상통한다는 점을 들어, 동성왕대의 문물이 익산지역 문물과 그 시대를 같이 한다는 가설을 들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15년조에 기록된 신라와의 국혼관계를 근거로 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이 바로 동성왕이라는 견해를 내세우고, 동성왕의 이름이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이니 '서동(薯童)'의 고훈 '맛동'과 상통한다는 주견까지를 설명하였다. 더욱 새로운 것은 동성왕이 일본에 성장하여 즉위했다는 전제 아래, 일본판 서동설화를 발굴하여 현지 조사와 함께 그 방면 전문가들의 견해까지 수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설화가 백제에서 전래되었다는 점과 그 일본측 설화의 주인공이 6세기 초(繼體 3년, 509) 인물이라 하여 동성왕의 그것과 연결된다는 추정을 들어 그 동성왕 주인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무령왕설을 보완할 만한 중요한 사실을 생략한 채, 동성왕설을 무리하게 내세움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이 자칫 동성왕 쪽으로 쏠릴 가능성까지 내 보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무령왕은 그 남방 익산 등지를 경영, 복속시키는 데에 보다 적극적이었고, 동성왕 15년에는 무령왕이 32세의 왕자로서 오히려 국혼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짙은 터다. 그리고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麻)'로서 동성왕의 그것보다 '서동'에 가까운 게 어학적 논증이다. 나아가 무령왕은 모후가 일본으로 건너가다 섬에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즉위해 그 행적이 지금껏 일본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온 데다, 일본판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509년대의 인물이라면, 그때는 무령왕이 즉위한지 10년에 가까웠으니, 이 양자의 상관성이 더욱 긴밀해지는 것이다.
'역사스페셜'은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무왕·동성왕·무령왕 등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백제문화사, 웅진시대문화사를 올바르게 재조명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한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이제 학계가 각성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중대한 과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깊이 있게 연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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