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두리한의원장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시인은 말했다. 내 시야에 가득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섬이다. 나는 시인과 다르게 사람 사이의 섬에 가고 싶지 않다. 내 관심은 사람에 있다. 이미 섬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내 접안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시청까지 다다르는 십 몇 분 동안 조금씩 내 존재를 위축시키다 겨우 도착 알림과 맞춰 일어선다. 갑자기 숨이 막힌다.
지난 2011년 십이월에도 여지없이 사건과 사고는 줄을 이었다. 봉도사는 감옥엘 갔고, 김근태는 하늘나라로 갔다. 사고로 몇몇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그리고 대구에서 광주에서 중학생들이 옥상에서 떨어졌다. 나이를 먹으니 비위가 약해진다. 심지어 로맨스 영화의 의도되고 자그마한 실수조차 손발이 오그라들어 잘 보지 못하는 나는, 쟁그라운 마음이 사무쳐 동급생에게 매 맞아(물고문도 당했단다...) 온몸과 정신에 시퍼런 멍 자국이 든 채로 결국 살던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그 아이의 기사를 잘 읽지 못했다.
아이의 부모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었고, 나 또한 공범의식에 눌려 미안하고 또 미안해 울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맘이란 게 대개는 비슷해서, 큰 녀석이 시방 군대에 가 있는데 김정일이 죽었다니 한반도 정세는 그만 두고 군대 간 아들 걱정이 먼저 들었는데, 죽은 아이 부모 맘은 어떨까 싶어 사무쳤고, 죽어서야 편안해질 거라는 아이의 유서를 읽으면서 내 초라한 눈물도 그 위로 아룽거렸다.
잘난 놈만 살아남고, 잘난 놈만 더 잘 살게 된다며 우리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몬다. 학교에선 자고 학원에 가야 공부하는 줄 아는 아이가 늘어난다. 학원비를 버느라 등골은 휘고 빈 주머니 털어 마시는 소주는 쓰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식 위해 산다며 때때로 기염을 토한다.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아이들에게 고대로 투영되는 것은 모르고, 그저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노력한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술 마셔 속은 쓰리고 잠 설쳐 눈은 붓는데, 아침에 학교를 간다고 꿉벅 절하는 아이 등을 두드리며, 오늘도 열심히 하고 오라고 내보낸다. 부모 자식 간에 대화에 학교 성적 외의 내용은 오르지 못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과 잘 통한다고 착각하며 출근길에 나선다.
다시 또 새해다. 이번 새해엔 되지 않을 금주 금연 따윈 붙이지 않으려 한다. 그저 말뿐일지라도, 외국인노동자를 돌보는 후배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아이에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오늘도 일찍 출근해서 한의원 청소를 잘 해놓은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내 허접한 페이스북에 올려놓는 친구들의 귀한 사연에 댓글 열심히 달고, 왜 저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고민해봐야겠다. 김어준 말마따나 감정이란 제한된 자원이라 내가 신경쓸 여지는 그리 많지 않더라도, 그 여지를 내 가족 내 새끼 내 돈으로만 좁히려는 이기심과는 좀 싸워봐야겠다. 그런 보잘 것 없는 노력이 학교폭력을 없애지는 못할 지라도, 섬처럼 굳어버린 타인들 사이에 비비고 들어갈 방법은 사실 그 것뿐이리라.
소통은 국가적 화두가 됐다. 하지만 연대가 내 것을 먼저 내어주어야 가능하듯이, 소통 역시 내가 먼저 고맙다. 고 말하고, 미안하다. 고 고개 숙이며, 참 훌륭하다. 고 칭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공감하는 순간 소통은 시작된다. 사람은 결국 서로 기대 사는 존재(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를 여는 오늘 아침에 조그맣게 책상머리에 낙서처럼 적어놓는다. 새해엔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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