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규 한남대 생활체육학과 교수 |
그 모습은 마치 나를 향해 외치는 것처럼 강렬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외침 속엔 비난이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비난은 현실을 비관해 어린 자식마저 죽음의 동반자로 삼는 이 사회의 부모들을 향한 것 같기도 했다. 또 그러한 일들이 간단없이 일어나는데도 무자비한 승자독식의 경쟁원리가 구조화되어가는 이 사회가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탐욕스런 상위 1%를 향한 소리처럼 들렸다.
한편 묘하게도 그 외침은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다. 남들에 비해 가진 것이 없는 '못난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메시지. 휠체어도 없기에 낮은 바닥에 앉아 있는 그가 삶의 여러 모습에 무감각해져 있는 '나'에게 당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잘 간수하라고 외치는 메시지.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의 존재는 잊어버리고, 더 갖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원망하며 살고 있는 불행한 '나'를 위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금년 한해를 시작하며 '중도춘추'에 썼던 글 중에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불행한 한국인에 대해 언급했던 일이 생각난다. 12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여전히 치열한 경쟁만이 개인이 생존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을까? 지난 한 해를 앞만 보고 달려온 내가 바로 빌딩옥상의 난간 위에 서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성공의 사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서 더 갈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면서 말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 잘못된 환상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데 충분했다. 벤츠 여검사로 상징되는 가진 자의 무한이기주의를 겪으며, 상대 선거진영과 선관위에 대해 디도스 공격을 감행했던 정치판의 마키아벨리즘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분노의 폭풍처럼 일어난 안풍의 거센 바람 속에서 그렇게 환상은 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걸인의 외침이 환상이 깨어진 우리의 의식 속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이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소리치는 그 걸인의 외침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자. 아래를 내려다보고 귀 기울이며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느껴보자. 생명의 근원은 뻗어나간 가지와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에 있는 뿌리에 있으니까. 그러면 아마 부쩍 추워진 바깥 날씨를 느끼며 난방비가 없어 추위에 떨고 있을 이웃이 있음을 생각해 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거리 곳곳을 장식한 성탄트리와 울려 퍼지는 캐럴송의 들뜬 분위기 가운데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의 기억 속으로 이천년 전 말구유에서 비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까?
성탄절을 보내고 한 해를 보내기 전에 화해를 구하고, 용서할 일들도 생각해보자. 남의 도움을 받으며 연명하는 앉은뱅이 걸인의 외침이 죽음의 기로에 선 옥상 위 사람에게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가장 설득력이 있는 위로가 되었음을 기억하자. 이처럼 우리 가슴에 따스함의 불씨를 지펴주는 그 걸인과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지 돌아보자. 상위 1% 가 무엇을 하든 상관치 말고, 나머지 99% 속 어디엔가 속한 우리가 먼저 조금씩 가진 것을 떼어서 하위 1%가 부르는 위로와 화해의 외침에 화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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