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태 전 대전지방변호사회장 |
왠지 귀에 익숙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이 무엇인지 잘못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별로 틀린 말 같지 않은데도 그렇다고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이 말이 개인주의의 함정이다. '내 것'이라는 표현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내 것'이 세상에 존재할까? 내가 가진 집, 땅, 아들과 딸, 사업체, 이 모든 것이 '내 것'인가? 더 나아가 내 신체, 손과 발 그리고 두뇌에 이르기까지를 우리는 '내 것'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단히 철학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한 이야기다. 우리의 육체를 돌아보자.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 그 육체를 사용하고 혹사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자연에게 돌려준다. 여기에 진정한 '내 것'이 있는가? 그저 자연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그래서 자연에게 돌려줄 육체만 있을 뿐이다.
하물며 내가 가진 집은 무엇인가? 법이 이 집은 '내 것'이라고 인정하면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으로 사회가 무너질 때에 이 집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사회가 나를 보호해 줄 때에, 나라가 우리들을 보호해 줄 때에 비로소 이 집이 '내 것'이 되는 것이지 이미 이러한 보호막이 없을 때에는 결코 이 집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결코 진정한 '내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로소 '내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여전히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을 할까? 우리가 해결해야 할 어떠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게 되고 서로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을 때 사람들은 상대적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은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못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함정이다.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변형된 것이다.
성의 자유로움, 낙태,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육체를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해'라는 말과 같다. 물론 타고난 기질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비정상적인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호받을 필요는 있지만 있지만 이것을 좋은 것이라거나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재산의 소유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산이니까 마음대로 산을 파괴해도 된다는 것, 많은 사람의 취업을 위해 기업은 자연을 파괴하고 공장을 지어도 된다는 것, 이것은 외형상 정당한 것 같지만 실제 개인이나 기업의 이기적인 목적에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의 악용이다.
그래서 선한 개인주의와 악한 개인주의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후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의무를 알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느끼고 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 사랑과 배려, 친절과 관용 그리고 베품과 나눔이 바로 선한 개인주의이며, 이에 반해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것을 함부로 하는 것, 탐욕과 무절제, 불친절과 나눔에 대한 인색 그리고 사치와 낭비가 바로 악한 개인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가 불행한 것은 바로 악한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업광고들은 사치와 무절제한 소비를 조장하고, 기업들은 기업을 확장하고 시장을 지배하려는 욕심에 가득 차 있으며, 부유층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의 사치를, 그리고 인터넷과 매스컴은 사람들에게 탐욕과 무절제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악한 개인주의의 범람 속 한 모퉁이에 잘 들리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외치는 선한 개인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악한 개인주의의 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곳에 눈길을 주고 있다. 정말 선한 것, 좋은 것 그리고 의미 있는 일들은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창조의 가장 신비로운(?)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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