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당신들의 천국

  • 오피니언
  • 사외칼럼

[김영호]당신들의 천국

[목요세평]김영호 배재대 총장

  • 승인 2011-12-21 14:08
  • 신문게재 2011-12-22 20면
  • 김영호 배재대 총장김영호 배재대 총장
▲ 김영호 배재대 총장
▲ 김영호 배재대 총장
연말은 이래저래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야 할 곳도 많아 언제 가는지 모르게 흘러가버리곤 한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면 새로운 해가 시작되어 어리둥절한 채로 일상에 다시 파묻히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데에는 정해진 규격도, 이렇다 할 의미도 없지만 사람들은 그 긴 시간을 임의적으로 잘라 송년이니 새해니 하는 이벤트를 만든다. 언제부턴가 계절이 흐르는 것 보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것에 더 민감해져 있다. 예전에는 경칩이면 봄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 개구리같이 설레는 마음이 일었고, 처서면 이제 그 창창하던 여름이 다 가버렸다는 마음이 들어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사시사철 에어컨과 난방기의 틈바구니 속에 사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이제 계절은 없고 시절만 외롭게 남아있다. 그러다보니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으레 겨울이 되면 추위에 떠는 이웃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화마에 장애인인 아들을 쓸려 보내고 자책으로 몸을 떠는 어느 아버지의 눈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했을 때, 내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돈을 아끼기 위해 가스버너를 틀어놓고 생활해야만 했던 그들을 우리는, 그리고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에너지 소외계층, 굳이 이름은 붙이자면 그들은 그랬다.

하지만 우리의 이웃인 그들에서 우리는 에너지만을 소외시켰던 것인가. 아니다.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기댈 곳이 작은 가스불이 전부였던 그들의 삶은 우리가 당연한 듯이 누리는 거의 모든 것들에서부터 외면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이 아무리 괴로운 것이라지만 이런 것은 삶의 당연한 일면으로 보기엔 너무 안타깝고 잔인한 일이다. 그들을 외면했던 것은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에너지를 가진 우리들이다. 에너지소외계층을 위한 지원금정책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기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을 때 나는 나의 무력함을, 시절의 무력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죄인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를 탓하겠냐며 고개를 숙였을 때 나의 고개도 저절로 숙여졌다.

시절의 촌극이다. 아무리 시대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밥 못 먹는 사람 없다는 듯 풍요의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지만, 시대의 한편에서는 여전히 가난을 섭식하며 비좁은 쪽방에서 가스버너에 몸을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절은 크리스마스와 송년을, 그리고 실체도 없는 새해를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새로운 해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는 해는 어제의 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살갗에 와 닿는 시절은 실상 매번 똑같은 것이다. 시절을 소비하지 말라. 매 순간 변하는 온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비극을 너무 멀리서 관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서 먼 일이라 치부하고,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그 비극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비극에 거리를 두려한다. 하지만 비극은 그렇게 맞이하면 안 된다. 비극의 틈새마다 켜켜이 쌓인 어두운 먼지들을 손길로 쓸어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모두 나의 풍요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죄의식도 품어봄직 하다.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의 풍요, 외롭게 단단한 '당신들의 천국'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물어봐야 한다.

시절은 개인에게 그러한 죄의식에 면죄부를 준다. 일한만큼 성과가 얻어지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가난한 이들은 열심히 살지 않아 가난한 것이니 동정도 관심도 필요 없다는 천민자본주의의 중심에서 그 면죄부를 받아든 개인은 거리낌이 없다. 백화점 명품관엔 지금 이 시간에도 줄을 서서 가죽가방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소비와 향락의 밤은 시절과 함께 깊어질 것이다. 뉴스 화면을 통해서 본 화마의 뒷모습은 죽음처럼 시꺼멓게 그을려 플래시 불빛에 번쩍번쩍 윤이 나고 있었다. 계절에, 소외된 이웃에 귀를 기울여라. 난방으로 뜨거워진 방바닥 위에 앉은 나의 비대한 내부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는 듯 했다.

계절이 지나가면 그만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한파가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시시각각 괴로워질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 비로소 겨울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외출제한 명령 위반하고 오토바이 훔친 비행청소년 소년원행
  2. 생명종합사회복지관, 제15회 시가 익어가는 마을 'ON마을축제'
  3. 충남대병원, 만성폐쇄성폐질환 적정성 평가 1등급
  4. 상명대, 제25회 대한민국 반도체설계대전 'SK하이닉스상' 수상
  5. [날씨] 단풍 절정 앞두고 이번 주말 따뜻한 날씨 이어져
  1. 한국건강관리협회, 창립 60주년 6㎞ 걷기대회 개최
  2. 서구 소외계층 60가정에 밑반찬 봉사
  3. 대전 노은지구대, 공동체 치안 위해 '찾아가는 간담회' 실시
  4. 샛별재가노인복지센터 생태로운 가을 나들이
  5. [현장취재]대전MBC 2024 한빛대상 시상식 현장을 찾아서

헤드라인 뉴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 대전에 집결한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 대전에 집결한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이 대전에 집결한다. 대전시는 '2025년 중소기업융합대전'개최지로 25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올해 행사에서 대회기를 이양받았다. 내년 대회는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중소기업융합대전'은 중소기업융합중앙회 주관으로 중소기업인들 간 업종 경계를 넘어 교류하는 것이 목적이다. 분야별 협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지역별 순회하는 화합 행사 성격도 띠고 있다. 2004년 중소기업 한마음대회로 시작해 2014년 정부 행사로 격상되었으며 2019년부터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