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갑동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마지막'이란 단어에는 묘한 감정이 복합되어 있다. 서글픔과 더불어 회한의 감정이 어려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추억같은 느낌도 서려 있다. 학창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의 인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더 이상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없게 된 알자스 로렌 지방의 어느 학교의 풍경이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슬픔과 비장함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의 대중가요 배호의 마지막 잎새는 인생의 허무함과 서글픔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이는 노래가 아니라 한편의 시다.
오 헨리(O. Henry)의 마지막 잎새는 꺼져가는 생명의 소중함과 더불어 뛰어난 인간미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이다. 폐렴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잔시. 그녀의 생명을 위해 담 벼락에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를 그려 준 이름 없는 늙은 화가 버만. 모진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잎새 때문에 잔시는 생명을 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잎새를 그려준 버만은 결국 폐렴으로 죽고 만다. 마지막 힘을 다해 한 생명을 살려 놓고 자신은 마지막을 맞은 그 아름다움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결국 마지막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의 삶도 누구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로운 것이지 않을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다 자신의 신체 일부까지 남에게 주고 가신 김수환 추기경. 자신이 받은 원고료까지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선뜻 내놓고 본인은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법정 스님. 아프리카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봉사하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 죽을 때까지도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마지막'도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그러한 인물의 예를 볼 수 있다. 반대파들에 의해 역적의 누명을 쓰고 갔지만 후대에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들이 그러한 예다. 고려 중기 나라의 중흥을 꾀하다가 김부식에 의해 토벌된 묘청. 고려말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다가 죽어간 신돈. 청렴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려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누명을 쓰고 가버린 조광조. 그런 인물들도 나름대로 가치로운 삶을 살다가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호암 문일평도 이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즉 “역사상의 진정한 반역아들의 행동은 일국을 뒤엎고 일세를 놀라게 했고 그들의 거사가 비록 실패에 그치고 말았지만 오히려 조선사를 창조한 일대 동력이 된 것만은 뚜렷한 사실이다”라고 했다. 한말 비운의 역사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민영환. 그도 아름다운 '마지막'을 장식하고 간 사람이었다. 명성황후 민비의 척족으로 고속 승진을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나 1905년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에 항거하며 자결함으로써 역사의 의인으로 남게 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우리는 무엇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까. 작게는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된 버릇을 마지막으로 종결하거나 저금통을 털어 불우 이웃돕기를 하는 것도 좋다. 크게는 세상을 바꿀 만한 책을 저술하거나 위대한 발명을 하고 잘못된 정치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과 자비로 가득찬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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