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리의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3년 동안 매일 어버이 묘소를 찾아 성묘 호곡했다’
조선 후기 대청호 인근에 살았던 차륜도·차륜주 형제 이야기다.
대청호산책로를 지나다보면 불과 40m 거리에 차륜도·차륜주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 쉽다.
입간판이 있지만 ‘차륜도·차륜주 정려각’이라는 명칭만 표기 돼 있고 가는 길도 대청호산책로와 달라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
대청호에 산책을 왔다가 우연히 이곳을 찾은 김택진(대전시 유성구)씨는 “대청호 인근에 이렇게 훌륭한 효자가 살았는지 몰랐다”며 “입간판에 내용이 적혀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찾아가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우 객원기자
차륜주 ․ 차륜도 (車輪周 ․ 車輪道) 정려각
거주 : 대덕구 미호동
차륜도 차륜주 형제는 조선 후기 정조 때 회덕현의 연안차씨 세거지였던 미호리의 새터말에서 출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효행과 정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얻으면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드리곤 하여 효동(孝童)이라 소문이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이들 두 형제와 관련된 효행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윤도는 17세 때 모친의 병환에 좋은 약을 구하기 위하여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떤 동자를 만났는데, 그 동자는 인육개탕을 써야 효험을 본다고 하였다. 이에 윤도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어 정성껏 달여 드리자 완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윤주는 어버이 묘소를 동면 법수리 봉황산 마루에 모시고 20여리의 험한 산길을 마다 않고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 호곡하니 세상에서 널리 효자라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종 28년(1891)에 우부승지 조중필(趙重弼)을 보내어 사실을 확인하고 교지를 내려 효자 정문을 세웠다. 차륜도 차륜주의 효행에 관한 사적과 정문(旌門)을 내렸다. (자료 : 연안차씨 지헌공파보 대덕의 전통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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