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기 대전대 정치학과 교수 |
한창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노력해야 할 20대와 30대가 희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소위 명문대를 가야만 인간다움을 인정받게 됨을 강요받아온 세대가 바로 20대와 30대다. 대학을 가서도 대기업이 요구하는 소위 '스펙'을 갖추어야만 대학생으로서 기본을 하는 시대가 바로 요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모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어느 정도의 스펙을 갖추었다고 해서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부모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이기는커녕 절망과 좌절이 우리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라고 하는 것을 한 것이 오히려 그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한 마디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20대와 30대를 이끌어줄 마땅한 멘토도 없다. 그리고 이들이 보고 배우고 닮고 싶은 롤 모델도 없다. 부모가 그리고 사회가 제시하는 멘토와 롤 모델은 '엄친아', '엄친딸'이 고작이다. 그런데 그 '엄친아'와 '엄친딸'은 그들 스스로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모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엄친아'와 '엄친딸'들 역시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모델도 아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우리 젊은이들이 찾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 사회에 '나꼼수'가 유행이다. 꼼수는 정상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정상적이어야 할 것들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로 인해 정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극히 비정상적인 것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비정상적인 세상에 정상적인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꼼수가 아닌 정상적인 희망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 그래서 더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안철수 신드롬'이 그냥의 신드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정상적인' 정치과정을 통한 선거가 아닌 다소 '비정상적인' 정치과정을 통한 후보의 당선이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울 시장선거에서 후보의 정책과 인물, 그리고 비전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후보에 대한 기대가 당선의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인물과 환경이 나타났고, 바로 그것에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까지도 지지를 보냈다. 물론 안철수 교수도 그리고 박원순 후보도 직접 희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젊은 세대는 그들로부터 희망을 찾으려고 한 것이 지난 재·보궐선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 스스로 희망을 찾아야 하고, 그 희망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 희망은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다. 절망이 아니라 절망을 극복해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좌절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20대, 30대만의 희망이 아니라 40대와 50대 그리고 장년층을 아우르는 희망이 새롭게 돋아나야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은 거대하고 원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게 필요한 작은 가치의 실천과 실현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가 나만의 작은 희망을 갖는 실천이 필요하다. 작게는 당장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희망이 모여 미래에 대한 희망과 희망을 실천하기 위한 계획이 되어야한다. 그 희망을 갖기 위해 우리들 가슴에 작은 '희망의 네잎 클로버'를 다는 운동을 제안해 본다. 그리고 그 네잎 클로버의 희망이 행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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