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으로 아내를 살해하고 경민은 15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친구 종석을 찾아간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두 사람은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번갈아 꺼내놓는데, '돼지의 왕'은 이 '회고담'이다. 그들이 안주 삼는 과거는 끔찍한 폭력의 기억들이다.
학교엔 두 부류의 아이들이 있다. 힘을 무기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이들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비굴한 웃음을 지어야 했던 경민과 종석은 자신들을 '돼지'라 불렀다. 그때 철이가 나타났다. 경민을 폭행하던 아이들을 곤죽을 만들며 경민을 구해낸 순간, 철이는 수호신, '돼지의 왕'이 된다. 그런데 왕이 들려주는 교훈이 이상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악이지. 착하게 살면 될까? 아니야. 힘을 가지려면 악해져야 해. 계속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괴물이 되어야 해.”
'돼지의 왕'은 강자와 약자의 대립이 아니라 약자와 약자의 다툼을 비춘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희생양으로 삼는 악다구니. 이 애니메이션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지점에서다. 칼로 오려낸 듯 날카로운 삽화체의 인물, 비명과 절규의 강도를 높이는 섬뜩한 사건들, 그리고 오정세, 양익준의 날 것의 목소리가 절망의 깊이를 더한다.
연상호 감독은 그 절망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영화가 향하는 끝. 그 끝에는 소름끼치는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어두운 사회의 일면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장면들에서 혐오감과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이런 모습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은 어쩔 것인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무비꼴라쥬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차지한 3관왕 영화를 다수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것부터가 그렇다. 대전아트시네마 상영 중.
안순택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