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덕일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역자학자로서 특정 사관이나 학맥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객관적 해석을 통해 삐뚤어진 역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해왔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등이 있다.
▲ 윤휴와 침묵의 제국 |
한 때 공주에서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장년에는 서울 쌍계동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19세 때 이미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던 그가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674년 7월에 청나라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북벌을 주장하는 대의소(大義疏)를 지어 현종에게 올린 것이었다. 북벌을 계획하던 현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의 직을 받고 출사한다.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가 이듬해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당색을 띠는 것을 싫어했던 윤휴가 서인들의 배척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주희가 편집한 중용의 장절을 달리 구분하여 자신의 주석을 붙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주희를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말이나 글은 일점일획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공격하고 나섰고, 이때부터 윤휴와 서인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서인들과 윤휴의 충돌은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의 상복을 둘러싼 예송논쟁을 발단으로 더욱 본격화 되었다. 무조건 당략에 유리한 쪽으로 견해를 통일해야 한다는 몰지성적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 당시, 예송논쟁은 이미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 문제가 되어 있었고 성리학은 권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반면, 윤휴는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계급적 차별이 없는 자신 이외의 천하라고 여겼다. 그가 출사한 이유인 북벌을 추진하려면 국가가 강해야 하고 국가가 강하려면 백성들이 부유해야 했다. 백성들이 부유하게 되려면 양반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 또는 완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지패법, 오가통법, 호포법 등 대부분의 개혁안은 서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결국 윤휴의 북벌론과 사회개혁 의지는 인조반정 이후 취약해진 왕권과 서인들의 권력 장악에 짓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윤휴가 죽은 이후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고 조선은 오랜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들의 후예가 오늘 날에도 정치권력과 부, 언론, 역사학계 등을 장악하며 현대판 노론의 맥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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