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둥근 원형의 돔형태로 건축된 삼위일체 대성당. |
우리에게 빵이라는 말을 전해준 나라로 알려진 포르투갈과 만난 것은 지난 6월 7일 밤 10시(현지시간)를 넘어서면서였다.
인천공항에서 암스테르담공항까지 11시간, 암스테르담에서 리스본공항까지 다시 3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밤 10시 50분이 돼서야 비로소 포르투갈 리스본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하늘에서 처음 본 리스본의 야경은 무척 화려했다.
맑은 날씨 속에서 차창 밖으로 해가 지면서 시작된 야경은 바다와 더불어 꽤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호텔주변을 산책했다.
교외의 언덕 아래에 위치한 호텔주변은 비교적 고급주택가로 보였고 보도는 돌조각들로 깔려있었다.(우리의 시멘트보도블록에 비해 정감이 느껴졌다)
우리네 연립주택처럼 보이는 동네의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빵을 몇 개 고르고 값을 물어보았더니 주인쯤 보이는 중년 남자가 그냥 가라고 한다.
포르투갈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유럽국가 가운데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에 속하는 포르투갈이지만 1400~1500년대에는 전성기를 맞았던 세계 최초의 해양 국가였다.
자국의 땅의 100배가 넘는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또 스페인보다 400년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여 지금도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국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태평양이라는 바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마젤란(1480~1521)이다.
포르투갈과 우리나라의 교류는 반세기 정도 되었는데 필자가 이곳을 찾기 한 달 전 한·포 수교 50주년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관광객이 본격적으로 포르투갈을 찾은 지는 불과 4년밖에 안되었다고 하는데 2007년 7월 대한항공이 마드리드에 취항하면서부터라고 가이드가 들려주었다.
포르투갈의 주산업 중 하나가 관광으로 한해 14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세계1·2차 대전 때 전쟁의 포화를 비껴간 덕분에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유지돼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럽대륙의 맨 끝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불리함에도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문화국가라는 이미지와 온난한 기후로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포르투갈어로 Lisboa)은 인구 180만명(교외까지 합하면 230만 명)의 테주강 하류에 자리한 포르투갈 최대의 도시다.
역사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도시로 '7개의 언덕의 도시'로 불릴만큼 언덕길이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유의 아름다움과 유적, 건축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리스본 시내에 들어섰을 때 곳곳에 있는 광장이 눈에 들어왔고 또 기둥모양의 조형물이 많다는 느낌도 받았다.
광장이 많다는 것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만나 얘기하고 교류할 수 있게끔 도시를 꾸몄다는 것으로 해석돼 이 나라의 자유가 실감되기도 했다.
▲ 파티마의 성모발현 기념 대성당. |
리스본 시가지는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누어지는데 두 지구는 공공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로 연결돼 있으며 테주강 연안과 시가지 사이는 '4월 25일교'로 명명된 서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로 연결돼 있다. (살리자르를 몰아낸 혁명 기념일이 4월 25일이다)
앞서 잠깐 말한대로 리스본 시가지는 광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도처에 광장이 있어 광장이름으로 행선지를 찾는다.
리스본의 중심 호시우광장에는 중앙에 높은 원기둥이 있는데 꼭대기에는 브라질의 초대국왕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필자일행은 리스본 중심부에서 조금 벗어난 벨렘지구로 갔다.
해양국가의 문을 연 엔리케왕자의 500주기를 기념해 만든 기념비가 이곳에 있으며 브라질로 떠나던 배의 통관수속과 선원들을 배웅했던 벨렘탑(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이 있는 곳도 이곳이다.
벨렘지구는 해양국가 포르투갈의 시원지와도 같은 곳이기에 가이드는 우리 일행을 이곳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또 이곳에 있는 제로니무스수도원에 갔는데 경탄을 금치 못했다.
16세기 마누엘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인 이 제로니무스수도원(세계문화유산임)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해 개척을 기념해 엔리코왕자가 세운 예배당 터에 세웠다고 한다.
마치 수를 놓은 것과도 같은 밧줄을 꼬아놓은 듯한 섬세한 문양이 늘어져 있는 마누엘양식의 절정이 바로 이 제로니무스수도원이다.
둘로 된 아치와 특히 내부의 안뜰도 섬세한 예술미를 자랑한다.
성당 안에는 왼쪽에 바스코 다 가마의 관이, 오른쪽에는 다가마의 위업을 시로 표현한 포르투갈의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가 묻혀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경건한 수도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1837년에 처음 문을 연 벨렘빵집이 있는 곳도 이곳 벨렘지구다.
▲ 독일 정부로부터 기증된 베를린장벽의 한 부분. |
이날 오후 4시가 조금 안 돼 파티마(Fatima)로 향했다.
파티마로 가는 차창 밖으로는 넓은 구릉지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목장과 올리브나무와 같은 식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얼마 후 도착한 파티마는 작은 시골마을로 1917년 5월 성모마리아가 나타나면서 가톨릭성지가 조성됐다.
전 세계 가톨릭의 5대성지중 하나로 꼽힌다.
세 명의 목동이 파티마의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예언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교황에 의해 성모마리아의 현신으로 인정되고 성모마리아가 나타난 언덕에 파티마대성당이 세워지게 됐다.
파티마대성당 앞에 조성된 바실리카광장은 로마의 베드로성당광장과 흡사한데 광장의 넓이가 축구장의 5배가 될 만큼 큰 규모다.
이 거대한 광장이 5월이면 순례자들의 행렬로 가득해 온통 촛불로 밝혀진다고 하니 대단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 광장 입구에 베를린 장벽의 모형이 있는데 독일정부가 기증했다고 한다.
그 연유는 이 파티마에서 독일통일이 예언되었는데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이에 대한 감사표시를 독일 정부가 한 것이라고 한다.
▲ 파티마의 성모는 포르투갈의 산타렝주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마을 파티마에서 세명의 어린 목동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칭호다. 당시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세명의 아이들 모습. |
대성당과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가 전부인 시골마을 파티마에서 포르투갈의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리스본과 파티마에서 본 포르투갈은 사람들의 비교적 순박한 표정과 함께 집과 거리가 아줄레주라 불리는 타일장식이 많아 정겹게 느껴졌고, 리스본은 한때의 영화가 배어있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임을 실감케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포르투갈은 예술적 감각과 종교적 심성이 어우러진 매력이 풍기는 나라였다.
글=조성남 주필·사진=황길연 대전중구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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