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곡선]왜 여행인가

  • 오피니언
  • 청풍명월

[직선곡선]왜 여행인가

  • 승인 2011-10-20 14:19
  • 신문게재 2011-10-21 21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 우난순 교열팀장
▲ 우난순 교열팀장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이 염세주의 철학자는 그러면서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가을이면 언제나 다시 희망을 품고 살아있는 것들의 비밀을 찾아나선다. 여름내 진초록의 빛깔을 뽐내던 잎들이 붉어지거나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느날, 빛바랜 재킷을 걸친후 여행을 시작한다. 늘 하는 여행이지만 예사롭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여행은 너무나 어렵고 불안감에 사로잡히지만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튀르 랭보는 불과 20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 그를 구원해 줬던 시(詩)와 영원한 작별을 하고 만다. 보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정신적 역동성이 너무 강렬해서 태양과 구름 속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본과 권력에 환멸을 느껴 '예술가와 이야기꾼의 아름답던 영광은 가라'며 죽을 때까지 남루한 일상에 허덕였다. 바람처럼 떠돌던 랭보의 삶은 생명력을 억압하는 이념이나 신비화를 거부하는 여정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안개 자욱한 새벽녘의 플랫폼에 서 있는 건 언제나 생경하면서 안도감이 든다. 곧 내 육체는 현실적 감옥을 벗어나 햇빛과 공기와 서늘한 바람에 섞일 것이다. 정신은 내 존재의 정체성을 낯선 이방인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확인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것이다.

혼자하는 여행에 익숙해진 지 오래됐다. 벗들과 함께 하다 어느날 약간의 망설임을 안고 홀고 여행길에 오른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 호기심을 타인에게 제지받지 않게 됐다는 기쁨을 알아버린 것이다. 낯선 도시의 사물은 인상의 풍경이 된다. 도시 뒷골목의 허물어져가는 담장, 루즈를 빨갛게 칠한 국밥집의 뚱뚱한 중년여인, 번화한 거리를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여행자는 시간의 끈을 풀어놓고 도시의 풍경을 탐색하는 즐거움에 매혹당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했다. 그는 운송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에 기차를 꼽았다. 개인적으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감을 주는 무궁화호를 선호한다. 기차에 올라 의자에 몸을 파묻고 창밖의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살아온, 살아가야 할 일들의 버거움이 차곡차곡 쌓였다 사라지는 쾌감을 맛본다. 기차 몸체와 레일의 이음새가 맞부딪칠 때마다 덜커덩 덜커덩하는 소리와 움직임에 몸도 리듬을 타면서 상념의 똬리가 술술 풀리곤 한다.

억새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날 즈음 해인사를 찾았다. 해인사를 둘러싼 오래된 소나무들은 햇빛 아래서 영원한 시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경판전에 모셔진 팔만대장경. 부처님의 말씀을 간직한 팔만대장경은 바람과 빛을 가르고 천년 세월을 한달음에 가로질러 지금 여행자와 조우하고 있다. 좌우이념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6·25전쟁의 와중에서 불타 없어져 버릴 뻔했지만 8만여 경판에 새겨진 현자의 진리는 너무도 담담해 보인다. 장경판전의 살창 사이로 들고 나는 가야산 계곡의 천년 바람은,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여행자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인류문명사에서 2000년간 물질적으로 진보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왜 인간은 점차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될까. 시인 허수경은 '살아내는 게 상처였'음을 고백하며 그녀의 열망을 억압하는 땅으로부터 탈출한다. 스스로 택한 유목민의 길 위에서 위안받을 수 있길 바랐지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은 멈추지 못한다. 허수경은 게르만족의 언어로 밥먹고 게르만족의 언어로 트로이의 파편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삶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탐욕의 시대 내가 극복해야 할 상처의 경계는 어디인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잠에서 깨어나면 소멸되는 악몽과 같은 것. 동트기 전, 남쪽 어디쯤 간이역에서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서성이는 나를 증명해야 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둔곡 A4블록 공공주택 연말 첫삽 뜨나
  2.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3.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4.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5. JMS 정명석 성범죄 피해자들 손해배상 민사소송 시작
  1. 대전보건대, 대학연합 뉴트로 스포츠 경진·비만해결 풋살대회 성료
  2.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3. 한국자유총연맹 산내동위원회, '사랑의 반찬 나눔' 온정 전해
  4. 구본길에 박상원까지! 파리 펜싱 영웅들 다모였다! 대전서 열린 전국 펜싱대회
  5. 대전시, 여의도에 배수진... 국비확보 총력

헤드라인 뉴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27일 낮 12시께 눈발까지 흩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 중구 한 교회의 식당은 뜨끈한 된장국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당 안에서는 대전자원봉사연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150여 명의 어르신이 빼곡히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얇은 패딩과 목도리 차림인 어르신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밥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한 어르신이 식당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가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7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다. 매일 혼..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창단 후 첫 K리그1 승격에 도전하는 충남아산FC가 승강전 홈경기를 앞두고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다. 충남아산FC는 28일 대구FC와 승강전 첫 경기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홈 경기로 치른다. 홈 경기장인 아산 이순신종합운동장 잔디 교체 공사로 인해 임시 경기장으로 천안에서 경기를 하게 됐다. 승강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28일 홈 경기 사흘 후인 12월 1일 대구로 이동해 어웨이 경기를 치른다. 승리수·합산 득실차 순으로 최종 승격팀을 정하게 되며 원정 다득점 규정은 적용하지 않아 1·2차전 결과에 따라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 시도가 2027년 열리는 하걔세계대학경기대회 성공 개최를 재차 다짐했다.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창희, 이하 조직위)는 27일 대전 호텔 ICC 크리스탈볼룸에서 2024년 제2차 위원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는 지난 3월 강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처음 개최된 것이다. 행사에는 대전시 세종시 충남도 충북도 등 충청권 4개 시도 부지사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시도 체육회장, 시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강 위원장과 조직위원회 위원이 공식적으로 첫..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