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 <대전시사편찬위 연구위원> |
이처럼 대전이 족보출판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다음 몇 가지의 특수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첫째는 접근성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통망이 확장되고 교통수단이 현대화 되어 전국이 1일생활권에 들고 있지만 철도가 중심교통수단이었던 당시는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한 대전이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로서 가장 접근하기가 쉬웠다. 이러한 교통상의 이점에 따라 자연스럽게 족보·문집을 발간하려는 전국의 문중은 대전으로 왔던 것이다. 족보·문집 발간에 높은 사명감과 상당한 소양을 갖춘 출판인들이 대전에 많았다는 점을 둘째로 꼽을 수 있다. 족보를 발간하려는 출판인은 적어도 족보와 문집에 대한 상당한 소양을 갖춤은 물론 보학과 한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출판인은 각 문중과 긴밀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문중출신이면 더욱 경영상 유리하다. 대전에는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출판업에 종사하거나 뒤늦게 뛰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1954년 경주이씨 국당공파(慶州李氏 菊堂公派) 족보를 시작으로 출판업을 시작한 회상사 박홍구 사장은 1960년대 이 지방 최초의 양장제본의 족보를 발간하면서 현재까지 전국 굴지의 족보발간 출판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1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설 족보도서관(回想文譜院)을 개관하기도 했다. 한편 농경출판사의 경우, 경북 의성지방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신기훈(申基勳) 사장이 일본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돌아와 조국 광복 후에는 대전시장을 역임하였고 농경신문사를 경영하면서 족보 발간에 관심이 많아 역시 농경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족보 문집발간을 시작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 무렵 비슷한 사명감을 가진 인사들이 속속 이 분야의 출판에 뛰어들면서 바야흐로 대전이 족보 발간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셋째는 족보·문집 발간 1세대는 족보발간 사업을 할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다, 출판업계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족보를 발간하는 인쇄업이란 일반 인쇄업과는 달리 많은 시설이 갖추어야만 했다. 우선 활자를 만드는 자모의 수가 지극히 많아서 자사에 독자적으로 주조기를 설치해서 활자를 주조해야만 하고 조판에서 인쇄, 제본에 이르기까지 1년에서 3년에 이르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투자된 자금의 회수가 더뎠다. 따라서 이 어려운 과정을 견디자면 충분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 이 족보 발간사업에 관심과 열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족보 발간 1세대들은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도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넷째는 우리나라 출판업이 당시 대부분 서울에서 이루어졌는데, 대전에서 족보 문집발간이 성행한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투자자금의 회수 기간이 늦기 때문에 대부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점에 착안한 대전의 출판인들이 충청인의 느긋한 성격을 본받아 비록 자금순환이 늦지만, 그 늦은 만큼 이윤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족보 문집을 발간하고자 하는 문중의 어른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무직업 인사들이어서 문중에서 수금한 자금으로 대전의 여관에서 오랜 동안 편집 교정작업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출판사와 그들과의 계산이 현대인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들이 대전을 족보발간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전국 최초로 사설 족보도서관과 뿌리공원에 한국족보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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