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금산문화원장 |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공생'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에 대한 글을 보았다. 본래 공생이란 말은 1873년에 안톤 데바리라는 독일의 생물학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처음 정의한 공생이라는 용어는 '서로 다른 종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정의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호모 사피엔스에다가 한민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에 사용하는 용어가 합당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다변화되고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렇게 다른 영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같은 국민이고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생각의 방향과 폭이 천차만별이다.
나이 먹은 사람은 젊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사람조차 어린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빼앗아갔다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을 주제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돈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없는 사람은 가진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이러니 어린 학생들에게서 늘어나는 것은 욕밖에 없다는 사회 현실로 반영되는 것 아닐까 싶다.
대결 구도로 간다면 당장의 승자와 패자는 생기겠지만 이 구도가 길어지면 결국 이익을 보는 세력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양보할 수 없으니 당신이 양보하라'는 식의 치킨 게임이 난무하는 것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수십억년 전에 세균 한 마리가 다른 세포에 파고들어가 엽록소가 됨으로써 번성했기에 생명의 진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녹조류가 온 세상의 바다를 뒤엎었고, 탄소동화작용으로 산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 마리의 세균이 파고들면서 미토콘드리아가 되어 자신도 살아남고 다른 생명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의 역할을 자청함으로써 고등생물의 출현이 가능했다고 과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만약 이들 세균이 각자가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면 이들도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성공적 공생으로 인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명체가 이 지구상에 살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서도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교유를 하고 관계를 맺으며 삶을 지속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집단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공생하며 살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내주고 상대방에게서 받을 것을 기대하는 아주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거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단순한 거래가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풍토인 것이 사실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대법원장 후보를 선출하는 투표에 종래의 반대 의사를 뒤집고 '아무 조건 없이' 참여하겠다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일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 사례도 결국은 이전투구의 와중에서 그 의미를 잃고 사라지기가 십상인 세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 서울 시장 선거에 후보로 나선 시민운동가 박원순씨가 재벌을 개혁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시민단체는 그 재벌로부터 후원금을 받았다는 것도 공생에 해당할까?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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