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전경. 가우디 설계 작품으로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
우리에게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우승으로 기억되는, 1992년 올림픽이 열린 도시로 각인된 바르셀로나(Barcelona)에 도착한 것은 스페인여행이 끝나는 6월16일이었다.
스페인 최대의 종교도시 사라고사를 떠나 바르셀로나 해변가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다 돼가는 오전 11시 40분께였다.
채 여름이 되지 않았는데도 해변가에는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해변가에 면해 있는 식당에서 스페인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으로 향했다.
가우디(1852~1926)의 설계로 너무도 유명한 이 성당 주변은 다소 혼잡했다.
한낮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관광객들로 성당 앞은 붐비고 있었다.
스페인을 돌아보면서 이슬람양식과 가톨릭스타일이 함께 어우러진 장중한 성당에 익숙해 있다가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성가족성당으로 불리고 있다)을 마주했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4개의 거대한 기둥모양의 탑 형태로 올라간 이 성가족성당은 기존의 카테드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내부는 높은 천장과 현대식 디자인으로 기존 카테드랄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성스러움을 주었다.
당초 이 성가족성당은 다른 건축가가 착수했는데 사정으로 그만두고 1년후 가우디에게 제의가 들어와 곧바로 수락했다고 하며 기둥만 있는 상태에서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의 건축적 모티브는 성경과 자연으로부터 얻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당에 쓰인 재료는 여러 종류의 대리석과 석회암이며 성당 앞쪽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조각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가령 남쪽면에는 천상의 과일을, 비둘기는 성령,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식을 돌본다는 펠리칸, 노아의 방주를 상징하는 큰 종려나무, 12제자를 뜻하는 기둥 등 정면에 새겨져 있는 조각들은 그 전부가 다 의미가 깃들어 있다.
8000명이 미사를 볼 수 있는 성당내부는 프레스코벽화가 없는 성당으로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한다.
또한 성요셉형상이 동상으로 세워진 성당도 이곳이 처음으로 지난해 이 성가족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교황 베네딕토16세는 이 성당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성당의 구도와 내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가우디 생전에 유럽의 크고 작은 부자들이 이 집을 사기 위해 줄을 댔다고 전해지는 구엘공원은 당초 구엘이라는 사람의 주택지였으나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탈바꿈돼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이 구엘공원의 건축 역시 자연에서부터 그 아이디어를 차용했는데 코끼리다리가 주모티브로 쓰였다.
▲ 건축의 거장 가우디. |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해 오랜 시간 동물들을 관찰했고 건축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혼자 의학공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또 좋아하는 애인도 있었지만 짝사랑으로 그쳐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고 현지 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다.
가우디가 건축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에우세비오라는 스페인의 섬유산업가가 가우디의 평생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독신이었기 때문에 수입의 대부분을 성가족성당에 헌금했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기부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26년6월 성당 앞에서 마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그가 사고를 당했을 때 너무 남루한 차림이어서 주위사람들이 그 유명한 가우디임을 알아보지 못해 병원에 옮기는 시간이 늦어져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마 노숙자쯤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가 일찍 병원에 옮겨져 더 오래 살았더라면 바르셀로나에는 더 많은 그의 건축 작품들이 세워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살아생전 마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가우디로부터 받았다.
마라토너 황영조가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몬주익언덕에도 가 보았다.
황영조의 달리는 모습이 새겨진 동상에서 사진도 찍었고 1992년 올림픽이 치러졌던 주경기장도 둘러보았다.
▲ 가우디가 설계한 파밀리아 사그라다 성당 전경. |
일찍이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는 바르셀로나를 '유럽의 꽃'으로 묘사했는데 유럽과 가까워 외세의 침입도 잦았다.
마드리드가 남성과 같은 도시라면 바르셀로나는 여성에 비견되는 도시로 1848년 스페인에서는 첫 열차가 개통된 곳이기도 하다.
2번의 만국박람회와 1992년 올림픽, 2004년 국제문화포럼 등 해마다 국제적인 행사가 그치지 않는 도시여서 스페인 내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린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상공업이 발달된 이 도시사람들은 이재에도 밝다고 하는데 체육인 사마란치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20세기에는 좌익과 사회운동의 본거지로 스페인내전이 끝난 후 10만명의 바르셀로나사람들이 쫓겨 갔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카탈루냐지방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녀왔던 바르셀로나는 19세기 중엽 '모데르니스모'라는 혁신적인 예술운동이 일어나는 등 예술과 문화의 도시다.
구시가지의 번화가 람브라스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행위예술가들이 행인들의 눈길을 모은다.
▲ 서양화가 박일미 作 '스페인 구엘공원' |
바르셀로나시내는 또 시민들이 자전거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끔 자전거를 세울 수 있는 자전거 정거장이 도처에 있었다.
1년에 25유로만 내면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며 다만 자전거를 타고 30분 이내에 갖다놓아야 한다고 한다.
이 바르셀로나에는 아리바오지역이라는 곳이 있는데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게이 집합소로 이름이 나 있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를 안내했던 여성 교민으로부터 바르셀로나 이민의 역사도 들었다.
독일광부와 간호사로 왔던 한 가족이 이곳에 재이민을 온 것이 시초였는데 태권도도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후 이 도장이 잘 돼 한국에서 태권도사범을 초청하고 또 이분들이 한국인을 함께 데리고 와 한국교민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유학생을 포함해 550명의 교민들이 바르셀로나에 거주하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각각 4곳의 교민교회와 식당이 있다.
바르셀로나항구에는 또 높이 60m의 콜럼버스탑이 서 있다.1888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세웠다는 이 탑을 보면서 스페인과 콜럼버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또 한 번 일깨워 주었다.
한편 이곳 카탈루냐광장에서 경제난에 항의해 일자리를 달라는 시위대의 텐트를 보면서 필자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승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생각에 잠겼다.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황금의 시대를 구가했던 스페인에서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구호를 보는 느낌은 참으로 야릇했다.
바르셀로나는 여러 면에서 기억에 남는 도시였다. /글·사진=조성남 주필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