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아버지인 고성군수 김성달은 아들, 딸 차별을 두지 않는 분이었다. 영민한 김호연재는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남자 형제들과 자유롭게 시도 짓고 공부도 했다. 그러나 혼인을 한 뒤 김호연재의 생활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 시대 여자들의 운명이겠지만, 낯선 시댁의 분위기에 남편마저 바깥출입이 잦아 부부간에 애틋한 정을 키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녀로서는 부족한 살림살이를 건사하는 틈틈이 울울한 자신의 심회를 시에 담아놓는 것이 그나마 마음을 붙이는 일이었다. 늦게 둔 자식은 아직 어렸고 말이 통하는 상대는 몇몇 집안 조카들뿐이었다. 멀리 두고 온 친정식구가 눈에 밟힐 뿐 이따금 오라버니가 지나가다가 들르면 그것이 그나마 즐거움이었다. 그러고 나면 또 몇 편의 시가 만들어지곤 했다.
42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200여 편이 넘는 한시가 지어진 것은 지금의 눈으로 보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작품들을 시가 쪽 집안사람들이 책으로 엮고 언해를 하고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들이 대를 이어가며 지금껏 보관해왔다는 사실이다. 김호연재의 한시집은 현재 원본과 사본, 언해본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요히 밝은 창에 만권서를 대하였으니, 성현의 마음 자취 앉아서도 삼삼하도다. 하늘 연못 같은 큰 도는 보기 어려우나, 오히려 아득한 뜻으로 잠깐 깨닫는구나.' '관서(觀書)'라는 제목의 이 시 또한 학문 너머로 배움의 열정을 품은 그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 김상용과 김상헌 등 당대 최고의 명망가 집안이라는 자부심, 학식과 자애를 두루 갖춘 아버지와 기린 같은 형제들, 그 속에서 귀여움을 받는 자기 자신,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었으리라.
고향 마을에서 뛰놀고 바다를 보며 포부를 키우던 김호연재에게 출가와 그 이후의 생활은 어느 면에선 그와 같은 가능성을 유예시키는 것이었다. 남겨 놓은 작품 여기저기에 울적한 심회를 얹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보는 사람의 심사마저 울적해진다. 여성의 굴레에서 속절없이 보내고 만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탓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는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볼멘 목소리까지 들려올 때가 있다.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다보면 여학생의 점수가 월등하고, 심지어 중년을 넘긴 나이가 되면 여자들은 밖에 나가도 받아주는 일자리가 있는데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헤드헌터 유순신이 이런 말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이 점점 여성들에게 유리해져가고 있다는 것. 능력 있는 여성이 많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소비산업의 발달 및 소비계층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 이 사회가 여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만들어야 하고 여성들의 구미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요즘 꽃비서보다는 전문성을 갖춘 안정된 기혼여성을 선호한다고도 한다.
여성들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커리어우먼과 파워우먼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 여성들을 원하고 있다. 300여 년 전 김호연재가 홍성에서 대전으로 시집을 왔다. 꽃가마 타고 온 신행길이 하루 이틀은 족히 걸렸겠지만, 지금 그 길에는 고속도로가 뚫렸다. 그 고속도로를 타면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세상이 그 만큼 바뀌었다는 뜻이다.
대전시 대덕구에서는 매년 가을이 되면 김호연재를 기리는 문화예술제를 개최하고 여성백일장을 펼친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게 되는 백일장에서는 또 어떤 여성 문사가 등장하게 될 지 한 걸음 앞서서 기대를 가져본다. 아파트 숲 한가운데에 오래된 고가 몇 채가 꽃봉오리처럼 앉아 있는 동춘당 공원 행사장은 김호연재의 숨소리와 함께 발자취가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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