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주제는 '세계미술의 조류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향, 오늘날 동양 안에서의 정신론과 사상 그리고 방법론들, 미술의 근저에 깔려있는 이론'들이었다.
또한 좀 더 심도 있게 클레멘트 그린버그 이론, 조셉 코주스의 개념주의 미술, 동양의 모노파 등의 이론들도 있었다.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과 또 다른 관점으로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김복영과 당시 공간 편집장 박용숙도 초빙해 다층적 문제의식을 심어주었다.
대전 78세대 멤버들에게 의미 있는 특강을 열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건용에게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전국적으로 날리는 김복영과 박용숙씨를 데리고 오니 대전 사람들이 놀랬고, 이건용의 얘기가 사기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또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전에서 터를 잡은 홍명섭, 홍익대 출신 유근영과 백준기 등을 가담시켰죠.
이 때 홍명섭에게 특강을 부탁했는데, 자신은 말재주가 없으니 백준기와 대화형식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 대화식으로 토론하며 현대미술을 접근시켰죠.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방학 때 대학에서는 강사료도 나오지 않아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일이 허다했죠.
어떨 때는 집사람이 일 나가서 얻어온 된장으로 국 끓여 먹는 것을 알고 대전 78세대 학생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나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참 고마웠죠.”
대전 78세대의 공식적인 세미나 장소는 주로 적십자사였다.
이유는 강정헌이 대학 때부터 적십자에서 봉사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적십자사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사진 촬영과 모임을 위한 장소는 송일영과 안치인의 화실이었다.
이를 근거지로 하여 대전 78세대 그룹은 새로운 정신과 시각으로 작품을 직관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분위기를 김철겸은 이렇게 회상한다.
▲ 1회 대전 78세대 전에서 김복영<사진 왼쪽>, 김장섭<서있는 사람>, 성능경<오른쪽 두번째>, 이건용<맨 오른쪽>의 모습. |
어느 때는 작품을 못 내는 회원이 나올 정도로 강하게 했던 생각이 나요. 서울이고 대전이고 지금도 아마 그런 그룹은 없을 것 같아요. 회원이 하나라도 반대하면 안 됐으니까요. 그것 가지고는 우리 그룹에 낼 수 없는 작품인데… 혹은 그거 어떤 이론이 약한데…, 이유가 약한데 하면 절대로 못 내는 거죠.”
이러한 변화는 김한과 이건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서울에서 가져온 아방가르드적 작품 성향을 그대로 목원대 학생들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대전 78세대의 태동에서 강정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1977년 스터디 그룹 회장과 대전 78세대 1회 회장을 맡은 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는데, 이유는 1979년 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하였고 1981년 여름에 제대하는 공백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 78세대의 첫 전시는 1978년 10월 14일 스산한 가을 대전문화원 화랑에서 열렸다.
오프닝 때는 김복영, 김장섭, 성능경, 이건용, 조평휘 교수 등 세미나를 듣기 위한 미술인들이 많았다.
이후 대전 78세대와 현대미술 작가들의 활발한 교류와 전시가 추진되었고, 퍼포먼스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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