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9월 1일… 전란의 폐허 속 닻을 올리다

1951년 9월 1일… 전란의 폐허 속 닻을 올리다

전쟁당시 전시속보판 형태… 투고 의존 수준 4·19혁명, 5·16사태 등 격동의 세월 겪어

  • 승인 2011-08-31 16:23
  • 신문게재 2011-09-01 13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안영진 전 주필의 중도일보 60년 그때 그 현장]-1. 질곡의 역사 속에서 태동

본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사와 충청의 60년 역사에 드리워진 명암을 함께 조명해보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영원한 중도맨'으로 오랜 세월을 본보와 함께 한 안영진 전 주필의 회고와 증언을 통해 지난 60년사를 되돌아보고, 그 뒤에 가려진 취재 현장의 이야기와 역사적 진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본 기획시리즈는 지난 60년 '중도일보'가 함께한 역사의 한 페이지와 현장을 독자들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이 고장(중부권)에는 6·25전쟁 직전까지 신문사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1951년 9월 1일 창간한 중도일보와 한발 앞서 50년에 대전일보가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뒤 이어 주간지 동방신문이 성남장 주인 김금덕에 의해 닻을 올렸다.

▲ 6·25전쟁 당시 대전 시가지 모습.
▲ 6·25전쟁 당시 대전 시가지 모습.
성남장은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남하 때 며칠 묶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해방 전에 중선일보라는 일제대변지가 있었으나 이는 논의의 대상에서 빼기로 한다.

50년대부터 중도, 대전 양 신문은 공존을 해오다 유신전초기 일도일사(一道一社) 정책에 중도일보는 문을 닫는 불운을 겪는다.

이후 15년 간 중도일보는 '유폐'와 '사장=동면', 일식(日飾)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가 88년 자유화(등록제) 시대를 맞아 복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전일보와 자웅을 겨루며 공존을 해왔다.

중도, 대전 양 신문 틈 사이에 '충청투데이(전 대전매일)'가 문을 연 것은 90년 이었다.

6·25전쟁 당시 중도, 대전 두 신문은 전시속보판 형태로 펴냈다.

기사내용은 일선의 전황을 주로 다뤘으나 특파원과 주재기자가 없다보니 종군기자의 투고에 의존하는 수준이었다.

그 형태는 '동해 LST 선상에서 ○○○ 특파원발'이니 전방과 육군본부를 오가는 연락장교의 전언(傳言) 아니면 외출 장병의 구술을 여과 없이 싣는 경우도 있었다.

전과(戰果)의 신빙성엔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시민들은 그래도 가판을 즐겨 찾았다.

이는 전쟁 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속성이기도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맥아더의 도쿄군재(軍裁)에선 피해보상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는 일화는 그래서 흥미롭다.

당시 일본군은 턱없이 전과를 부풀렸다.

미국 군함 1척을 격파하면 4~5척으로 과장했던 것이다.

군재에서 맥아더는 대본영발표 숫자대로 보상하라는 추궁에 일본 측이 좌불안석했다는 일화는 때문에 유명했다.

6·25 전란 통에 발간한 중도, 대전 두 신문이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56년 무렵이었다.

▲ 중도일보는 1951년 전시속보판 형태로 시작돼 6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 중도일보는 1951년 전시속보판 형태로 시작돼 6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때부터 두 신문은 1면은 정치, 2면은 경제, 3면은 사회, 4면은 문화면으로 고정시켰다.

체제는 한 발 앞선 일본신문을 모방한 것으로, 이는 중앙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회상은 폐허 선상에서 혼돈과 난맥, 무질서 그 자체였다. 집권 자유당은 그때 이미 파죽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치폭력, 사회비리, 정정불안 등으로 분위기는 사뭇 흉흉했다.

그 바람에 일상 신문 지면은 원색적인 어휘로 일관했다.

여야 간의 격돌을 '이전투구'니 '돌진, 격돌, '사생결단', '대전시청은 복마전(伏魔殿)인가?' 등 원색적 표제로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말 순화가 어려워졌다고 걱정할 만큼 신문에선 생경한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 게 사실이다.

언론(기자)은 그래서 불가근불가원의 존재라고 경원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세계 4대 시성(詩聖)의 한 사람 '괴테'의 기자 평을 떠올리는 소위가 여기에 있다.

'기자(평론가포함)란 달리는 말꼬리에 매달린 파리'라며 찾아온 기자에게 나가라고 호통 쳤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한국 신문은 운명적으로 저항의식을 타고나 의식 속엔 그와 같은 인자(血)가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서구 신문은 전달기능에 자족, 상업주의 룰을 따르지만 한국 신문은 '민중계도'라는 선구자적 입지와 저항의식이 배합되어 있다는 논리다.

한국 신문의 효시라는 '한성순보' 자체가 지도층인 관리가 손수 제작했다는 역사성을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파이어니어'라거나 '울트라'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더욱 그렇다.

그리고 개황과 동시에 일본이 침략했다는 역사성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6·25 전쟁을 거쳐 자유당 말기의 신문보도 경향은 대체로 폭로와 저항 쪽으로 나갔으나 한 두 신문이 자유당을 대변하다 화를 당한 사례를 역사는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무렵 중도일보는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는 사설과 기사를 연거푸 실었다.

3·15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무너지자 민주당이 급부상, '장면 내각'을 탄생시켰으나 연일 데모와 소요로 해서 광장은 늘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무기력했다.

4·19혁명 주체가 학생들이지 민주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설상가상으로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이 신·구파로 나뉘어 반목하는 바람에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 와중에 지방선거를 실시, 도지사·도의원을 뽑았는데, 충남지사는 신파인 김학응이 당선된다.

무능한 장면내각은 그 바람에 군부의 쿠데타를 맞았다.

박정희가 이끄는 군부는 혁명공약을 내걸며 사회질서를 바로 잡고 나선 군부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혁명공약 선언문에 대해 일부 식자층에선 이기죽대는 이가 많았다.

혁명주체인 중령, 대령이 초안했다는 설과 모 석학이 썼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다.

공약을 기초하는데 긴장한 탓인지 문맥이 생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여론이 무성했다.

'미래지향적', '점진적', '퇴영적' 등 문체가 적(的)자 투성이였다.

5·16사태를 맞아 필자는 '이럴 수가? 곧 풀리겠지'하는 생각에 사태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5·16 그날 오후였다.

조치원 32사단과 3관구 사령부 군 트럭 7~8대가 대전 시내를 시위하고 있었다.

기관총을 내걸고 소총을 멘 군인들이 군가를 부르며 중앙로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백마산 전투와 저격능선에서 살아나온 필자로선 대수롭지 않은 사태로 여겼다.

라디오에선 통행금지, 정치활동 중단, 각급 사회단체의 집회금지 등 포고령이 쏟아져 나왔다.

따라서 신문방송 보도는 군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신문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리둥절했다.

이후 그 누구도 신문대장을 갖고 계엄사령부에 가기를 꺼렸고 군부를 출입하던 기자마저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기자들 중에는 병역미필자가 많아 거리에서 헌병이나 군인을 만나면 골목으로 피해 다닐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 한 동안 계속 되자 필자는 수검 전담기자가 된 셈이었다.

한번은 대장검열이 늦어져 “곧 계엄령이 해제될 판인데 왜 애를 먹이느냐?”고 대들자 평소 부드럽게 나오던 검열관이 얼굴을 붉히며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할 정도로 군 장교들의 자세는 날로 변해갔다.

당시 윤보선을 비롯한 야당의 반발과 케네디 미행정부의 압력에 박정희 의장은 TV에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는 이제 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갑니다”라고 선언 했다.

그날 밤의 분위기를 박정희 의장실 당번은 이렇게 전한다.

당번 '기미코(君子)'는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여인으로 세련된 종업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박정희 의장실 당번을 맡겼다는 것인데 호텔 사장 권서정은 '기미코'는 호텔의 보배라고 늘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그녀는 훗날 도청 앞에 옥림(玉林)이라는 요정을 개업했는데 항상 손님이 줄을 이었다.

박 대통령이 내전하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최고 위원이나 정치인, 기관장들은 늘 이곳을 찾았다.

그 무렵 필자는 끈질기게 그녀에게 만년장 시절 일화를 캐물었다.

“나 돈 좀 벌게 해 달라”며 '만년장 야화'라는 책을 써서 그것이 영화화하면 '기미코' 사장은 '김지미'보다 더 유명해질 수 있다며 접근을 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권력이란 누릴 때와 무너질 때의 모양새가 그러한 것인지 평범한 여자로선 알 길이 없다”고 그때 일을 증언(?)한다.

'군 복귀'를 선언하던 밤부터 이미 혁명주체들의 행동은 구겨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평소엔 박 의장 실을 노크하는 자세가 그렇지 않았다면서….

전엔 한 손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똑똑' 노크를 했는데 그날은 와이셔츠 차림에 주먹질 하듯 쿵쿵 때리는데 놀랐다고 당시 일을 회상한다.

어느 최고위원은 소리치며 “의장님! 깨셨나요?”하고 친구 대하듯 하더라며….

'군 복귀'를 선언하던 날 밤 '기미코'가 의장실에 들어가 보니 박 의장은 군화도 벗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울음인지 흐느낌인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외람된 이야기로 '게모노(Beast:짐승)'의 울부짖음 같더라는 것이다.

혁명이 불발하면 역적 신세가 될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 후 그는 '군 복귀'를 번복, 다시 플래시를 받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언론계에도 크나큰 변혁을 가져왔다.

신문방송 허가제와 활동범위규제, 언론인의 자격기준(프레스카드제)을 비롯 언론인의 진로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에서 나온 조치였다.

60년대 사조는 앙가주망(engagement)의 파고가 강타 할 때였다. 이는 '또 다른 직종에의 진출' 또는 사회의 '수평이동' 그 자체를 뜻한다.

그 바람에 신문사 주필, 편집국장, 정치부장은 자의든 타의든 정계(비례)와 관직에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그 바람에 언론인들의 변신은 찬란(?)한데가 있었다. 국회의원, 장관, 총리, 정당,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돋움하는 이가 많았다.

그렇게 군사문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변화를 부추겼다.

70년대부터 줄곧 접촉해온 일본의 중견 언론인들은 필자에게 진반 농반으로 '한국 언론인이 부럽다'고 했다.

일본에선 명문 '도쿄대'를 나와 신문에 발을 내디디면 커봐야 '편집국장', '주필=논설위원장'인데 한국에선 무한가도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한국 언론인을 진심에서 선망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에겐 장인(匠人)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무분별한 참여나 변신이 선망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문화가 이렇듯 기승을 부리자 국민들 사이엔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지 말고 육사에 보내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 중도일보 출신 윤성한 기자는 국회의원, 조준호는 정당대변인을 거쳐 광역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바 있다. /안영진 전 중도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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