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2월 28일자 중도일보에 우등생이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진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됐다. 52년 동안 자신의 사연이 담긴 신문기사<왼쪽 사진>를 고이 간직해온 김두경씨는 현재 중도일보의 애독자이기도 하다. 손인중 기자 |
1960년 2월 28일. 당시 선화동에 위치해 있던 중도일보 편집국에 '까까머리' 청년이 들어왔다.
20살의 김두경 군은 어린 청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김 군이 본사를 찾은 이유에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형편에 장학금을 받아가며 대전공업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대학 입학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할 처지에 놓였던 것.
김 군의 안타까운 사연은 다음날인 29일자에 '우등생인 김군이 대학 진학 할 길이 막연하다'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당시 보도에는 김군이“회사의 사원도 좋고 관청의 사환도 좋고 아무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다만 충남대 야간학부에만 입적할 수 있다면 영예는 더할바가 없다”고 호소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고등학교 졸업까지도 파란만장했다. 대전공고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내지 못해 걱정하던 김군은 당시 대전공고 교장에게 편지를 썼다.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다고 공부를 시켜주지 않으면 교육자로서 자질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맹랑한 내용이었다.
당시 교장은 등록 기한을 지난 그를 고등학교에 입학시켜주었고, 거취를 해결할 수 있는 가정교사 자리까지 마련해줬다.
“당시의 김인수 교장선생님은 진정한 교육자셨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생전에 찾아뵙고 평생을 감사하며 살았어요.”
3년 장학생으로 고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학을 앞두고 또다시 학비 마련을 위해 중도일보를 찾아왔다.
그의 사연이 소개되자 본보 신문을 본 독자가 독지가를 자처하고 나섰다. 삼성동에서 군수공장을 운영하던 여성 독지가는 선뜻 김군을 집에 머물도록 하고 학비까지 지원했다. 김군은 독지가의 집에 머물며 독지가 자녀의 가정교사를 하는한편 공장일을 도와주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독지가 덕분에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경찰시험에 응시해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경찰이 된 젊은 청년은 이후에도 중도일보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 그가 경찰의 날을 맞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게 된 1996년 10월, 36년전의 일을 회상하며 중도일보에 또 한번 그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36년 전 용기 준 중도일보에 감사'라는 내용으로 소개된 그의 사연은 경찰에 입문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전하고 있다.
김씨는 40여년간 경찰로 근무를 해오다 1999년 총경으로 명예로운 퇴직을 했다. 그는 여전히 중도일보를 구독하는 애독자다.
52년이 지난 지금 노인이 됐지만, 누렇게 변한 당시의 신문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는 중도일보 60주년을 맞아 꼭 축하하고 싶었고, 감사하고 싶었다며 52년만에 중도일보 편집국을 다시 찾았다.
김두경씨는 “중도일보와 나와의 인연은 특별하다. 중도일보가 당시에 어린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대학 입학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라며 “어려웠던 시절 주변의 관심과 격려로 인생을 살아온만큼 모든일에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김민영 기자 mi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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