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올 여름을 돌이켜보면 분초 단위로 쪼갤 만큼 바쁠 때도 있었다. 엄살을 안 키우는 성격인데도 엄살을 부렸다. “꽃이나 피거든 만나세”, “풍엽(楓葉)이 만산(滿山)할 제 만나세”, “술이 익걸랑 만나세”, “찬바람 불면 만나세”. 1분 빨라진 벽시계 바늘을 바로잡으며, 도포자락에 시간을 거느리고 살았던 선인들의 아리송한 품을 그리워했다.
▶시간관념과 미적 감각도 고금이 다르다. 고려 시대만 해도 꽃 중의 꽃은 복사꽃이었다. 복숭아꽃 핀 곳에 이상향을 설정했다. 살구꽃도 귀히 여겼다. 고전에 '○○꽃 피면…' 하고 계획 잡는 일이 수다하게 나온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위아래로 네 살 연배까지 끊어 15인 시 모임을 결성한다. 다산의 형 약전, 채제공의 아들 홍원도 그 동인이다. 서로 만날 날을 정해 놓은 게 운치가 있다. ―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얼마 전 이완구 전 충남지사(전 국회의원)가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총선 출마 지역구를 묻자 “대전과 충남은 행정구역상 금이 그어져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건이 무르익으면 어디든 출마할 수 있다'로 해석된다. “아직 시간이 많다. 찬바람이 불면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장고 중임을 내비쳤다. '때가 되면 정치에 나서겠다'가 속뜻이다.
찬바람 얘기에 생각나는 자유선진당 변웅전 대표. 그는 국회 비교섭단체 홀대 문제로 잔뜩 열받고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찬바람 났으니 대통합도 멀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늘이 두 쪽 나도 교섭단체 구성” 운운했다. 대통합은 몰라도 소통합은 이뤘다.
▶정치의 99%는 말이다. 화려한 말발이다. 말 속에 뼈를 심는 정치인, 직설화법 아닌 빙빙 에둘러 말하는 정치인, 통역이 필요한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 서러워라 통역이 필요한 여성도 있다.(남자생활백서) “당신 무슨 생각해?”→'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줘.' “내 생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그랬다가는 당신과는 끝이야'. 노련한 바람둥이, 유능한 정치부 기자는 상황 전체를 캐치해 의미를 캐는 마술사들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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