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훈 한남대 경영학과 교수 |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홍타이지)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ㆍ대신ㆍ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도 조선을 둘러싼 환경에 약했던 부분이 묘사되어 있다. 8개월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중국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1주일만인 12월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영화에서는 기마병으로 이것을 표현하여 속도감을 주었던점은 나름대로 빠르게 인식되었던 것 같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던 삼전도의 항복과 50만명의 포로로 이어진 굴욕의 역사속에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개인의 전투력은 활이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어가던 아버지는 남이에게 지인(여동생)을 지키라고 유언했다. 13년후 그 누이가 시집가던 날 청나라(만주족)의 침입으로 짐승처럼 포로로 끌려간 누이를 되찾기 위해 홀로 대군에 맞서는 조선의 신궁 남이를 등장시킨 것은 우리스타일의 활과 기술, 노력이 함께하면 무서운 신무기가 된다는 간접적인 메시지라고 하겠다. 그리고 신궁 남이의 신묘한 활 솜씨로부터 청나라의 왕자와 부하들을 지켜야 하는 청나라 명궁 쥬신타의 전투는 바람과 속도 그리고 대담함의 심리전을 표현한 영화의 백미다.
삼전도의 굴욕후에 인조는 환도했지만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ㆍ윤집ㆍ오달 등 삼학사를 잡아, 1637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50만의 납치자들을 속환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남이는 위험에 처해있는 여동생을 위해 활을 갖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누이와 처남을 데리고 조선에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여동생을 능욕하려하는 왕자에게 목숨걸고 싸우는 지인은 조선의 양반가문으로 야만인에게 대항하는 조선여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에 누이와 처남을 데리고 상처 입은 몸으로 배타고 강을 건너며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은 가슴을 찡하게하며 국권없는 국민은 불쌍하다는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며칠뒤면 국치일인 8월29일이다. 이 영화를 보고 통쾌도 했지만 왠지 슬펐다. 그리고 감독이 의도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내마음속에 잊혀졌던 병자호란을 상기시키고 삼전도비, 인조의 항복, 환향녀 등을 생각하게 했으며 필자에게 최종병기 활은 배우들의 액션보다는 역사의 순간을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것이 국치일을 맞으면서 느낀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1636년부터 청나라에 복속되어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나라의 속국이었다는 것과 1910년 이후로는 일본의 식민지였음은 거의 300여년을 우리 주권없이 남의나라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는 것이다. 국치일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날인데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하게 만든 최종병기 활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나간 역사와 현재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의 새로운 역사를 생각하게 했다.
일본의 독도영유권문제, 중국의 역사왜곡문제 등은 현재의 역사로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국가의 힘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것이기 때문에 힘을 키우든지 힘에 필적한 외교력과 대항할 국가전략을 키워야지 외부환경을 무시한 척화론만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영화 최종병기 활은 우리에게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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