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소화도 못 시키면서 버터를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목원대 학생들에게 너무 수준 높은 강의는 오히려 무리수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전 78세대들에게는 탈이 나도 자생력 있게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서울과 대전의 교통이 편리하여 섭외가 수월했다고 할 수 있지만, 현대의 미술 이론과 그 작품 경향들을 시간차 없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강사를 선별하는 윤영자와 김한의 예리한 판단력 덕분이었다.
대전 78세대의 중심인 75학번들 예컨대 김철겸, 강정헌, 김익규, 신현태, 이두한 등 3~4명은 대전 중앙여중 옆 대전 천변에 화실을 만들어 1년 정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때 화실 이름이 '강변화실'이었다.
강변화실이라는 명칭을 붙였던 이유는 '프랑스의 센 강변이 예술의 소재와 장소가 되어 아름다움을 많이 연출해낸 것처럼, 대전에서 새롭게 예술의 터를 닦아나갈 우리 세대가 대전 천을 센 강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책무에서였다.
여느 화실 풍경도 그러하겠지만 강변화실에서의 생활 역시 아름다운 추억과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이름을 거론해 가면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자기중심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밤새 술을 마시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으며, 2~3일 동안 밥을 쫄쫄 굶어본 적도 있다고 한다.
특히 숭전대(한남대) 75학번이던 신현태, 함상호, 양동길, 송신호 같은 친구들이 강변 화실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예술의 혼을 품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동년배들의 중요한 카페이자 작업장 역할을 한 강변화실은 개인의 화실이라기보다는 지역적, 시대적 책무성을 의식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화실 생활이 대전 78세대가 태동하게 된 중요한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76년에 와서는 화실 경영 문제와 멤버들의 생활 패턴에 변화가 생기다 보니 장기간 지속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강변화실은 1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에는 작업 장소를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강변화실이 없어진 후 여기에 모이던 동년배들과 선배들이 개인 화실을 전전하면서 예술론을 토론하기도 했는데, 더러는 자취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친구 방에 모여 생각을 교류했죠. 그 때 친구들이 주로 나(강정헌), 김철겸, 김익규, 고동현 등 이었고, 이들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변화하는 과정은 무엇 때문이냐? 왜 그런 변화가 불가피했느냐? 과거가 현대로 변화될 때 어떻게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느냐? 하는 것들을 고민했죠.” 이 시기가 대학 2학년까지 지속되다가 3학년쯤 되어서는 예술 토론을 확장시키기 위해 스터디 그룹을 결성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의 스터디 그룹은 목적과 방향성만 있었지 별도 명칭은 없었다.
하지만 스터디 그룹이 1978년 처음으로 그룹전을 하면서 '대전 78세대'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세대'라는 의미는 연령적 동시대 개념보다는 '동시대의 사고' 내지는 '사고와 표현의 변화 시점에 놓여 있는 정신적 개념 의미'로 해석해야 옳을 듯하다./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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