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일보가 걸어온 지난 60년은 충청인의 삶과 가까이해온 세월이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6번이나 반복하는 세월 동안 충청의 江과 山, 자연환경이 얼굴을 바뀌는 모습을 고스란히 따라간 노력의 흔적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중도일보 지면에 반영된 사회변화상은 지역민의 애환이 투영된 역사자료다. 충청사회의 주요 변모상과 그때 모습을 담은 신문 지면을 통해 당시를 반추해보며 더나은 미래를 모색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역대 1일 최고기온을 기록한 것은 1994년 7월 24일 대전 37.7℃와 충남 보령 1994년 7월 25일 37.8℃였다. 이후 ‘불볕가뭄’이란 말까지 나오면서 심지어 7월 26일자 18면<사진2=가로수>에서는 가뭄으로 고사가 심각한 가로수에 물을 주는 등 지역민들이 폭염과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추억의 IT= 최근에는 스마트폰, 테블릿PC 등 IT 기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했다. 하지만 현재의 IT 기기 이전에 지역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 추억의 IT기기는 당시만 해도 첨단기술을 자랑하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받았던 무선호출기(일명 ‘삐삐’)가 있었고 시티폰, 휴대폰 등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용어로 FDMA(주파수분할 다중접속), TDMA(시분할 다중접속), CDMA(부호분할 다중접속) 등이 알아놓으면 유익한 통신용어(본보 1995년 8월 2일자 9면 보도)였다.<사진3=통신용어>
또 컴퓨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컴퓨터 학원이 급증했으며 문서작성 프로그램인 ‘한글’을 배우면서 단축기 사용 여부에 따라 문서작성 능력을 판가름하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본보에서도 1995년 8월 9일자 11면 컴퓨터 지면에서는 단축키를 요약해 알려주는 코너를 넣어 지역민들의 컴퓨터 학습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추억의 영화관, 이제는 멀티플렉스로= 대전시민들의 추억이 남아있는 영화관. 1990년도 중도일보 지면 하단의 광고란에는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중앙, 허리우드, 동양, 예술, 아카데미, 대전, 스카라, 제일 등 영화관이 즐비했다.<사진4=영화관> 당시에는 개봉영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본보 지면에 각 영화관별로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홍콩의 느와르 영화와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지역 영화광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도 한 영화관들이다.
그러나 첨단 설비와 문화공간을 들여놓은 최신 영화관 앞에서는 이들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시민 이상화(51ㆍ여)씨는 “비좁은 영화관 의자에서 본 ‘사랑과 영혼’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며 “요즘에는 3D, 4D 하는 영화가 나오지만 그 당시 영화관의 추억에 비할 게 못된다”고 회상했다.
최근에는 대전지역에 최초로 IMAX 영화관 뿐만 아니라 멀티플렉스라는 개념으로 복합 문화공간이 마련되고 있어 영화관을 통해본 지역의 변화상 역시 빠르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지역 패션의 바람= 1967년 1월 가수 윤복희를 한국 최초의 패셔니스타로 등극시킨 미니스커트 바람이 1970년대 충청권에도 불어오면서 유행을 이끌었다. 본보 1972년 7월 9일자 5면에는 미니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등장했다.<사진5=미니원피스>
격주 정도로 패션소식을 전하는 코너에서 여름 원피스 및 미니스커트가 나오면서 지역 여성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가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영향에 힘입어 지역에서도 미니스커트 열풍이 불긴 했지만 지역 사회 원로들은 급변하는 여성들의 패션에 그리 달갑지 않은 눈초리를 보냈다.
올들어 지난 7월 11일 롯데백화점 대전점 정문 앞에서는 시원스런 노출이 낯설지 않은 비치웨어 패션쇼가 열리기도 해 격세지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듯 싶다.
최근에 들어서는 하의 실종 패션으로까지 이어지는 등 여성들의 노출은 이젠 패션의 일부로 여겨지며 자신감의 표출로도 해석되고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어머니의 마음 = 자녀의 성공과 행운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다. 2003년 10월 30일자 본보 1면에서는 대입 수능시험일을 일주일 앞두고 학부모들이 자녀의 행운을 기원했다. 수능시험은 1993년 말에 처음으로 도입되면서 한때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우려를 키우기도 했다.
거슬러올라가 학력고사를 거쳐야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지난 1990년(본보 12월 18일자 1면 보도)에도 91학년도 대입학력고사가 실시되고 있는 고사장 교문에서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학무보들의 정성어린 기도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시대가 흘렀지만 자녀의 앞날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만은 변치 않는 모습으로 중도일보의 앵글 단골메뉴다.
▲힘들어도 서민들은 꿋꿋했다= 서민들의 생활고는 어제나 오늘이나 큰 차이가 없다. 1963년 9월 12일 대전지검에서는 당시 벌금형을 받고도 납기일 내에 벌과금을 납입하지 않은 150명에게 무더기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200원을 납부하지 않아 구속된 사람들이 상당수였던 만큼 그만큼 서민들의 삶이 고단했음을 엿볼 수 있다
70년대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서민들의 살아남기가 한창이었다. 그 가운데 학생들 역시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는 등 구슬땀을 흘리기도 했다. 본보 1972년 3월 15일자 3면에 보도된 대전석교국교 어린이들은 8백m나 떨어진 마을까지 자갈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등 새마을운동의 열기에 동참한 모습이 실렸다.
1997년 IMF 외환위기때 서민들은 너나 할것없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팔을 걷었다. 1997년 12월 1일자 1면에는 당시 서민들의 생존법인 아나바나 운동이 확산되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려움을 꿋꿋하게 극복하려는 서민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중도일보에 담겼다.
중도일보는 지난 60년 동안 역동적인 충청인들의 사회변화상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 온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인들의 희노애락의 순간 순간마다 현장을 지키며 용기를 붇돋우고, 슬픔을 나누며 같이 지켜온 친구이자, 충직한 산증인이었다.
이경태 기자 biggerthan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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