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私家)의 족보편찬은 17세기 접어들면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명문가가 몰락하는 대신 신흥세력이 대두해 족보를 경쟁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때문이다.
전란으로 인한 재정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공명첩을 팔고 공을 세운 노비에게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게 해주는 군공면천(軍功免賤)이 실시되면서 신분질서가 해이해졌다. 이를 틈타 명문가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족보를 보강했고 신흥세력은 미천한 가계를 은폐하고 가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기도 했다.
성봉현 충남대 연구교수는 “왕실족보와 일반가문의 족보는 그 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왕실족보가 왕을 중심으로 그 자손의 일정한 대수의 자손만 수록하는데 비해 사가족보는 대체로 시조에서부터 족보를 편찬할 때까지의 모든 자손을 수록한다”고 설명했다.
또 사가족보는 족보의 형태와 내용 면에서도 성씨와 문중별로 크고 작은 차이를 드러낸다.
▲ 영광김씨 팔고조도. |
송백헌 족보박물관 자문위원장(충남대 명예교수)은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부모, 부의 부모, 모의 부모 등으로 아래에서부터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고조대(高祖代)까지 작성하는 족도(族圖)인데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조대까지 16명의 조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팔고조도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과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광김씨 팔고조도는 족보박물관에, 풍양조씨 팔고조도는 향토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 충주박씨내외자손보. |
1694년 만들어져 필사본이 전해지는 '충주박씨내외자손보'는 시조 박영을 중심으로 친손과 외손을 가리지 않고 14대까지 기록해 박씨보다 타성의 이름이 더 많을 정도다.
문보(文譜)는 문과 급제자들에 대한 인명록 또는 문사록(文士錄)이며 무보(武譜)는 무과 급제자의 가계를 성관별로 나눠 기록해 놓은 특수보다.
문보는 각 급제자의 성명, 자(字), 출생연도 및 출신과거의 연도와 과방의 종류를 기재하고 그 아래로 부와 조, 증조, 고조 순으로 8대까지 부계직계를 기록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조선은 양반관료사회였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 계승하는데 중요한 일이었으며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몇 명 배출했느냐에 따라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무보의 체계는 무과 급제자를 전주 이씨를 필두로 각 성씨별로 편찬하고 성씨 내에서는 본관별로 편집했는데 전주 이씨의 경우는 월등히 많으므로 이를 다시 파별로 수록했다. 현재 족보박물관에 있는 무보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덕수이씨 계보에 들어있으며 충무공 이름 옆에 부모 이름이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도 볼 수 있다.
폐쇄적인 당쟁상황에서 나온 당색보(黨色譜)인 남보(南譜)와 북보(北譜)도 있다. 남보는 당색이 남인이었던 남인의 주요가계를 수록한 특수보이며 북보는 북인의 계보를 적은 것이다. 방위개념에 따라 오보(午譜)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인을 오인(午人), 서인을 유인(酉人)으로 별칭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봉현 교수는 “남보는 각 성씨 아래 본관별로 편차했는데 남보에 수록된 성씨 순서는 그 성씨에 딸린 본관수가 많은 성씨부터 수록해 나간 것”이라며 “남보와 북보는 족보에 토대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족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성을 바꾸는 것은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겨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나 본관을 바꾸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본관을 개칭한 대표적인 성씨가 창원공씨인데 공자의 54세손 소(紹)가 1351년 고려와 와서 창원을 식읍(食邑·나라에서 왕족, 공신 등에게 주던 일정한 지역)으로 책정 받아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창원을 본관으로 가문을 이어오던 공씨는 조선 정조 18년(1794년) 공자의 후손인 모든 공씨들에게 본관을 곡부로 쓰도록 하라는 왕명에 의해 본관을 바꾸었다. 이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원공씨에서 곡부공씨로 바뀐 두 족보 모두가 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경 필암서원 소속 노비와 그 자손들의 인적사항을 족보형식으로 적은 노비보(奴婢譜)는 보물 제587-1호로 원 소장처는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이나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위탁보관중이다. 족보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노비보는 필암서원 사노비(寺奴婢)를 수록한 장부인 노비안(奴婢案)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며 다만 수록방식을 일반 사가의 족보기록양식을 따랐을 뿐”이라며 “일반 노비안이 부자, 혹은 모자관계만 밝히는데 비해 이 노비보는 노비의 자녀를 4대까지 추적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족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족보는 보통 한 집안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책 형태를 말하는데 연산서씨는 1853년에 4장의 오석(烏石)에 족보를 새겨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바위에 굴을 파고 보존했다. 4장의 돌 앞뒷면과 측면에 4500여자를 기록한 연산서씨석보는 족보를 돌에 새긴 독특한 유물로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족보가 만들어지고 계승될 수 있을 것이란 상식을 뛰어넘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환관(내시)들이 만든 족보도 있다.
1920년 이윤묵이 편찬한 '양세계보(養世系譜)'는 조선시대 역대 내시들을 성씨별로 분류해 그 가계를 기록했다. 정확히 말하면 족보보다는 내시인명록에 가까운 양세계보는 내시 사이에도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성이 다른 자손(양자)을 입양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를 보존했다.
양세계보를 보면 안씨 아들이 지씨, 지씨 아들이 유씨, 유씨 아들이 정씨처럼 아버지와 아들, 손자의 성이 각기 다르다.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족보박물관에 가면 복사본을 볼 수 있다.
신분증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족보도 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크게 만든 세계(世系)는 일반족보와 달리 시조부터 할아버지까지 직계조상의 이름만 추려서 기록한 휴대용 족보다. 족보박물관에는 안동권씨세계를 비롯해 밀양박씨세계, 은진송씨세계, 파평윤씨세계, 경주김씨세계 등 다양한 휴대용족보가 전시되어 있다.
휴대용 족보에 대해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가승(家乘)은 작성한 사람이 자기 가계를 직계에 한정해 밝힌 계보인데 가첩, 가계, 세계도 넓은 의미의 가승으로 주로 휴대에 편리하도록 절첩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며 “과거 보러가는 선비나 보학하는 이야기꾼들이 지니고 먼 길을 가거나 전쟁 중 숙식을 해결하는데 이용하고 시집가는 딸에게 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글=임연희·동영상=금상진 기자
※본 시리즈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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