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발릭 내 페르가몬 유적 전경. |
한국가톨릭성지순례단(단장 김정수 바르나바 천안신부동성당 주임신부) 일행은 5월27일 터키의 차낙칼레 트로이를 떠나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 유적이 남아있는 아이발릭으로 향했다. 아이발릭은 터키 서부 에게 해안의 항구도시로, 그리스 영토인 레스보스섬과 불과 20㎞ 떨어져 있다.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울창한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고,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해안에는 준다섬을 비롯한 작은 섬들이 있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청동기 후기와 철기 시대의 집터, 도자기 등의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비잔틴 시대까지 그리스 문화권의 영향력하에 있었으나 13세기 이후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러나 1922년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까지는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거주했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 그리스풍의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다.
고운 모래로 덮인 해안과 인근의 섬들이 해양 스포츠에 적합하고,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하고 주요 산물은 올리브 제품이다.
▲아이발릭 내 페르가몬=알렉산더 대왕의 유산을 이은 페르가몬 왕국의 장대한 유적이 우뚝 솟아있는 도시가 바로 페르가몬이다. 비옥한 들판에 위치한 아담하고 평온한 도시인 이 곳 최고의 명소는 북쪽의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아크로폴리스다.
페르가몬은 기원전 3세기 전반 트라키아 왕에게 복속하고 있었으나 필레타이로스가 독립을 쟁취하고 아탈로스 1세에 이르러 사실상의 왕국이 됐다. 에우메네스 2세때 최전성기를 맞아 로마제국의 대 시리아전때 협력해서 전공을 세워 소아시아의 서반부를 지배했으나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따라 왕국을 로마에 양여했다. 로마는 이를 소아시아라 이름하여 그 속주로 삼았는데 수도 페르가몬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 아이발릭 내 페르가몬 유적 전경. |
페르가몬 교회는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중 한 곳이다. 여기서 7대 교회는 '완전'을 의미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충만한 숫자, 완벽한 숫자가 7이다.
페르가몬은 150년을 유지한 나라이고 페르가몬 교회는 사탄의 교회에 앉아있다고 칭하는 곳이다. 사도 요한이 7개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모두 '희망'을 담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사탄의 권좌에 앉아있는 너희들이 빨리 회개해서 돌아오라'고 권하고 있다.
이때 당시 히포크라테스는 페르가몬 병원에 근무하면서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고 했다. 마음을 치료하면서 명상과 지압,치유, 상처 수술과 쾌유를 빌었다.
성지 순례의 목적이 변화에 있다면 순례자들은 주의 은총속에서 순례하면서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순례하는 동안 들판에 피어 있는 야생 양귀비를 비롯한 아름다운 들꽃들을 바라보면서도 주의 은혜를 느끼고 감탄하는 시간이 됐다.
과연 순례자들은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섬기고 선택하는지, 순례자들이 삶과 신앙 안에서 변화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페르가몬 교회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이 곳의 파시미나 숄은 산양의 목털로 만들고 한 장에 1700달러정도 한다. 어깨를 덮는 숄이 반지구멍으로 빠져나갈 정도로 매끄럽고 부드러운게 특징이다. 사도 바오로의 천막은 산양의 털로 짜서 가로와 세로를 직조했고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들었다. 염료산업과 자색 옷감은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황실 색깔은 금색, 자색이고 철모산업과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다.
이 곳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를 떠올리며 순교는 선교의 씨앗임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이 시키면 모든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바오로는 아라비아에도 3년을 거주했다. 다혈질 성격에 행동파였던 바오로가 생각한 것은 바로 실천하는 사도였다. 순례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지 바오로를 보며 되묻게 된다. 바오로와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키프러스 출신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키프러스는 살라미스의 동쪽 항구로 반은 그리스이고 반은 터키다.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바오로가 전도한 최초의 유럽 신자가 바로 리디아이다. 리디아 성녀가 까발라라고 하는 네아폴리스에 가서 공장장을 하고 있을때 필리피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리디아가 사도 바오로를 향해 '신자로 여기신다면 저희 집에 와서 쉬십시오'라며 사도 바오로를 꼼짝 못하게 했다고 한다.
▲ 아이발릭 내 티아티라 유적 |
티아티라 교회는 신앙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될것에 대해 합리화시키려 하지는 않는지, 교만을 부리지는 않는지, 타협을 보는 종교생활을 과감히 끊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티아티라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졌다.
티아티라 교회는 신앙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안된다며 신앙을 잘 관리하고 다듬어서 정원의 아름다운 나무같이 가꾸고 묵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들이 촘촘하게 진열된 아이발릭 시내 상점가 모습. |
이후 기원전 3세기에 재건돼 로마시대까지 번영했다. 중세 비잔틴, 십자군, 아랍, 투르크간에 스미르나를 두고 쟁탈이 거듭됐으나 그리스 문화의 한 중심으로 그리스 상인에 의해 무역이 성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에 의해 파괴되고 그리스령이 됐으나 1923년 터키에 반환됐다. 주변 일대에 곡물, 목화, 올리브, 야채, 잎담배, 과실과 견직, 양탄자를 생산하는 배휴지를 끼고 있는데다가 비누와 면직물, 염색 공업이 활발해 상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또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도 활기를 띠고 있다.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고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 철도 종점이 되고 있다. 고대의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 포세이돈과 데메테르 상 등이 발굴됐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스미르나는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르나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전도지역으로, 모두 다 사도 요한의 교회였다. 원죄 없이 잉태한 성모마리아 봉헌 기념 교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로마시대의 창을 전시해놓았다. 스미르나의 현재 지명은 이즈밀로 그리스와 터키의 혼혈 미인이 많다. 인구 330만명의 이 도시에서 한국교민은 1000명이다. 이 지역의 볼리까르뽀스 주교는 86세에 화형으로 순교당했다.
스미르나에 바오로가 세운 매우 중요한 교회가 바로 이즈밀 홀리 로사리오 성당이다.
김정수 신부는 “그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며 “신앙을 받아들인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각오해야 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예수님께서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해도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셨다”며 “주님의 자녀로 성별된 신자들은 세상 마귀와 죄악과 허례허식을 끊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또 “세상은 성별된 것을 보고 신자들을 많이 미워하고 시기한다”며 “세상에 성별된 사람들 속에서 고통과 갈등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주님이 신자들을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한다”며 “세상은 주님을 선택할 수 없고 세상은 모든게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히브리어로 '알라'는 여호와, 이사베이라고 한다. 아랍어로 이사베이는 '예수님'이란 뜻이다. 또 히브리어 솔로몬은 아랍어로 '슈레만'이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여행은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해 45년부터 49년까지 이어졌다.
/터키 아이발릭=한성일 기자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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