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는 육창주 선생(1889~1950년) 비문은 이렇게 쓰여있다. 육 선생의 후손들은 이 비문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보령경찰서에 근무하는 손자 육종민(40) 경사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지칠 때면 조부 묘역을 찾아 경찰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한다.
육 경사는 “부친을 통해 듣기로는 조부께선 팔자 수염을 기르셨고 기개 넘치고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니셨다고 한다”며 육 선생을 떠올렸다.
이어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식들을 올바르게 양육했고 한학과 한의학에 조예가 깊어 이웃들에게 글을 가르치셨다”고 덧붙였다.
육 선생은 고향인 옥천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던 육 선생의 애국심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 애국지사 육창주 선생의 손자 육종민 경사가 자택에서 조부의 훈장 등을 보며 딸에게 조부가 참여했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그의 자녀도 증조부의 애국헌신 정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늘날 독립된 조국이 있기까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면서 증조부도 이에 힘을 보탰음을 강조한다”며 “그런데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인 큰 딸이 글짓기 대회에서 증조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써서 상을 받아 기특하다”고 소개했다.
또 “살면서 힘든 일이 닥쳐도 스스로 바른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교훈을 증조부에게 배웠으면 한다”며 자녀들에게 당부했다.
매년 돌아오는 광복절이면 육 경사는 조부를 생각하며 경찰관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그는 “경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렵고 불행한 시민들로 경찰관은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아야 한다”며 “애국지사 후손으로서 법과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직무를 수행하는 기본에 충실한 경찰관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육창주 선생은…
33세 였던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상을 보러 서울에 갔다가 독립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인 옥천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같은달 27일 옥천 이원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에게 체포됐으나 탈출, 다시 만세시위를 지휘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2005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기념행사 때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7년 9월 11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강제일 기자 kangj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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