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레도로 가는 길에 있는 돈키호테 마을. |
이번 스페인여행에서 덤으로 간 곳이 지브롤터해협과 돈 키호테의 무대인 라 만차(La Mancha)였다.
톨레도로 가는 길에 책에서 보던 풍차와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 라 만차를 보게 된 것은 이번 여행에서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6월 14일 오전 그라나다를 출발한 버스가 가도가도 평원인 스페인 중남부를 거쳐 돈키호테의 배경이 된 '캄포 데 크리프타나'마을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낮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페인식당에 가면 올리브기름이 식탁에 올라와 있는데 빵을 이 올리브기름에 찍어 먹는다.
대평원을 가는 차창 밖으로 올리브나무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올리브열매의 70% 정도는 기름으로, 20~25%는 샐러드로, 나머지는 화장품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올리브의 수확철이 되면 모로코에서 수천명의 저렴한 노동력이 들어와 일해준다고 하는데 그들의 노고로 필자도 스페인여행 동안 빵에 올리브유를 발라먹고 건강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된 라만차마을에 도착해 버스가 비좁은 골목길에 주차하고 내렸을 때의 황량함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도무지 세계적인 명작의 고장이라고 느낄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캄포 데 크리프타나라는 이름의 이 마을은 너무도 우리네 시골마을과 닮아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곧바로 양철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돈키호테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이 시골마을 카페로 들어갔다.
▲ 돈키호테의 배경이 된 라만차 지방의 풍차. |
기념촬영을 하면서도 과연 이곳이 돈키호테같은 위대한 명작이 탄생한 곳인가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의구심은 인근 콘수에그라의 풍차마을을 방문하면서 가시기 시작했다.
대평원에 솟아오른 언덕배기에 거대한 풍차가 보였고 그곳에서 멀리 평원을 보면서 비로소 이곳이 돈키호테의 무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란 상상이 피어올랐다.
풍차는 얼핏 보기에도 높이가 10m는 돼 보이는 꽤 큰 규모였다.
내부로 들어갔더니 1층은 곡물저장이 가능한 창고로 쓰였고 그 위층은 곡물을 찧는 기계가 있었으며 맨 위층은 전망대역할을 하도록 돼 있었다.
바람이 굉장히 시원하게 느껴졌던 풍차언덕에서 문득 풍차를 향해 창을 들고 달리는 돈키호테가 연상됐다.
여관을 성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기사로 단정한 돈키호테가 들판의 하얀 풍차를 적으로 오인해 돌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비로소 왜 이곳이 돈키호테의 무대가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빼고 영국을 말할 수 없듯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빼놓고 스페인을 논할 수 없다.
돈키호테 동상은 스페인의 도처에 있는데 특히 수도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에 세르반테스를 기념해 1930년에 조성된 곳이 관광객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
이 스페인광장에 있는 세르반테스동상은 돈키호테가 힘없는 그의 말 로시난테에 올라타 있고 그 옆에 다소 살찐 모습의 시종 산초판사가 있다.
또 양옆에는 책을 들고 있는 여자와 하프를 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한 동상이 있는데 책을 들고 있는 여자는 현실속의 여자이며 하프를 들고 있는 여자는 둘씨네라는 상상속의 여자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고층건물 속에 둘러싸여 있는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동상은 그 뒤의 탑모양 조형물과 함께 매우 뛰어난 조형미를 뽐내고 있었다.
▲ 서양화가 한인수 作 '돈키호테의 추억' |
그러나 불행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극복하고 '돈키호테'라는 저돌적인 인간형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스페인사람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죽은 후 더 유명해진 작가다.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마드리드 근교의 조그만 대학도시에서 가난한 시골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떤 정규교육을 받았는지조차 명확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제대로 문학수업을 받지 못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은 황금의 시대를 목전에 둔 국운의 상승기였는데 그 역시 군인이 되고자 했고 그 유명한 레판토해전에 참가했다 팔한쪽을 쓰지 못하게 돼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또 귀국길에는 그가 탄 배가 투르크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5년간 포로생활도 한다.
그후 몸값을 치르고 마드리드로 온후 비로소 문필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결혼도 하며 잠시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듯 했으나, 세비야로 가 무적함대의 식량징발계원이 돼 일하다 주교령에서 지나치게 징발해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라나다에서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다가 공금을 맡겨둔 은행가의 실종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처럼 이런저런 불행이 닥쳤음에도 세르반테스는 말년에 매우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12편의 중·단편소설을 실은 모범소설집(1613)의 출판을 시작으로 당시의 시인들을 비평한 장편시와 창작희곡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 양철로 만든 돈키호테 동상. |
제1부는 1605년 출판됐다.
돈키호테의 내용은 많은 사람이 아는 것처럼 라만차에 살고 있는 늙은 시골선비가 그 당시 유명하던 기사도이야기를 읽고 이에 심취돼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며 돈키호테를 자칭하고 여행을 떠나면서 세상과 좌충우돌하는 희극적인 이야기다.
이 돈키호테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햄릿형과 대조되는 인물형이기 때문으로 햄릿이 생각에 골몰한 우유부단형이라면 돈키호테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돌진형이다.
실제로 이러한 두 인물형은 세상을 살면서 쉽게 부딪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더불어 알려진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어쩌면 셰익스피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묘한 두 사람의 인연은 같은날 죽은 것으로 기록되면서다.
1616년 4월 23일 1시간 차이로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죽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도 같아 이날이 그의 기념일이다.
유엔이 세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죽은 날을 기념해 '세계 책의 날'로 지정했다는 말을 가이드로부터 전해 듣고 일순 이 두 사람을 추모하는 마음이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52세에, 세르반테스는 69세의 삶을 살았으나 그들이 남긴 고전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아무리 지금 시대가 디지털과 인터넷시대라고 하지만 인간의 고뇌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킨 고전은 여전히 그 성가를 자랑하고 있다.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인간성의 끝없는 향상을 보여준 위대한 작가들의 삶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재삼 일깨워준 라만차여행이었다.
/글=조성남·사진=황길연 중구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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