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규 한남대 생활체육학과 교수 |
산성을 향해 걷는 내내 오토바이 폭음이 메아리쳐 울렸다. 그렇게 평화가 깨진 심란한 마음으로 한동안을 걸은 후였다. 산성이 머지않은 곳에서 다시 돌아오는 오토바이의 소리가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 앞서 가던 나이 드신 여자 분이 길옆의 경사면으로 황급하게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비탈위로 올라서며 마침 눈에 띈 굵직한 통나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첫 번째 오토바이에는 통나무를 들어 보이고, 바로 뒤에 오던 두 번째의 헬멧을 향해서 '이놈!'하면서 내리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꽤나 놀랐던지 고개를 움찔하며 숙이고는 속도를 높여서 그대로 달아났다.
아드레날린이 온 몸에 일으킨 맹렬한 반응이 점차 가라앉자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느꼈던 경박한 승리감에 대해 부끄럽고 한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 나이가 얼마인데….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우리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그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우리가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 때 우리는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족산에서의 내 분노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에셀의 글을 잘 읽어보면 그 분노를 정당하게 해주는 몇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사적인 동기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부조리나 불의에 대한 공분(公憤)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분노의 어느 부분에 정의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존심과 같은 사적인 감정이 다분히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둘째, 에셀이 말한 프랑스어 '앵디녜부(Indignezvous)'는 벌컥 성냄을 의미하는 '분노'라기 보다는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옳은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분개'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 때 내 행동이 평정심을 잃지 않은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분노는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독재정권에 저항한 것처럼 폭력이 불가피한 상황도 있다. 그러나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이며,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다. 폭력이야말로 희망에 등을 돌리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 이르러 계족산에서 나의 분노는 정당성의 모든 근거를 잃어버린다. 이 점을 생각했더라면 그 때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들을 제지할 보다 효과적인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스테판 에셀이 말한 '분노'해야 할 일들이 많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문제, 최저생계비의 문제, 경쟁과열로 병든 교육 등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그 분노를 정당하게 하는 조건을 생각하자. 지하철 막말남의 '분노'에 대한 우리의 '분노'도 그 조건을 갖추었는지 살펴볼 일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는 브레이빅의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인간애라고 하였다. 덧붙여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자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과거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분노'가 만들어준 자유 안에 살면서도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일으킨다. 기억상실증은 연민의 대상이지 분노의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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