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함브라궁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나자리궁의 섬세한 건축미. |
이날 예당에서 들은 테너 박영범의 그라나다(Agustin lara곡)는 그라나다의 화려한 영화와 아름다운 도시 모습을 노래와 연주로 잘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그런 곡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일행이 그라나다에 도착한 것은 6월 13일 오후 5시30분께였다.
6월의 스페인은 해가 거의 밤10시께나 돼야 떨어지므로 아직 관광할 시간은 몇 시간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라나다로 들어오는 도로에서 필자는 뜻밖의 풍경에 눈을 의심하면서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라나다를 둘러싸고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네바다가 설산(雪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에 흰 눈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에 시달리다 마주한 시에라네바다산맥의 흰 눈은 그라나다에 대한 그동안의 환상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그라나다의 상징 알함브라(Alhambra)궁으로 향했다. 도심을 지나 교외 경사진 언덕길을 버스가 가는데 알함브라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위치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언덕 뒤쪽으로 향하면서 비로소 알함브라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타레가(1852~1909)의 애잔한 기타곡으로 10대 때부터 들어왔던 '알함브라의 추억'으로 각인된 알함브라궁전을 40년도 더 지나 비로소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감격도 잠시 알함브라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받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 알함브라궁에 있는 사자의 방으로 스페인 국보로 지정돼 있다. |
하루에 7000명이 우글거리다보니 이어폰도 고장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시 새로운 이어폰을 받았는데 비로소 가이드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알함브라궁은 약간 황토빛이 감도는 벽돌로 지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로 '알함브라'는 붉다는 뜻이라고 가이드가 들려주었다.
30를 웃도는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알함브라궁에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으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됐지만 1950년대 스페인정부가 이 알함브라궁을 제대로 복원하기 전까지는 그저 야산에 버려진 이슬람유적 중 하나였다는 설명을 듣고 일순 앙코르와트가 생각났다.
▲ 타레가가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을 작곡한 배경이 된 정원의 분수. |
복원당시 약200명의 이라크기술자들이 이 알함브라궁에 와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고 한다.
이 알함브라궁이 있는 그라나다는 코르도바와 더불어 스페인에 있는 이슬람문명의 대표적인 도시로 그 기원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로마시대때 광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231년(또는 1232년)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인 나사리왕조가 이곳에 독립왕국을 세운 후 1492년 가톨릭의 두 왕에 의해 패배할 때까지 약250여 년 동안 이슬람문명의 최전성기가 펼쳐졌던 무대가 바로 그라나다였다.
그라나다대학은 역사가 약600년 정도 되는데 과거 그라나다의 번영과 융성함을 짐작케 된다.
이슬람최후의 왕 보아브딜이 페르난도와 이사벨여왕에게 그라나다를 내주고 시에라네바다산맥(3400m의 험준한 산들로 이루어졌다)의 험한 길을 넘어가다가 알함브라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그 심정이 얼마나 쓰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드넓은 평원에 자리한 그라나다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낙원을 건설하고자 했을 터인데 그곳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떠나야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알함브라는 이러한 그라나다의 이슬람문명을 응축시켜 놓은 대표적인 건축물로 원래는 성채·왕궁·욕장·모스크 등을 성벽으로 둘러싼 성채도시였다고 한다.(그라나다를 정복한 이사벨여왕은 이곳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수도로 삼으려고까지 했으며 실제로 임시수도이기도 했다)
▲ 알함브라 궁 내에 카를로스 5세 궁과 나자리 궁, 알카사르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
메수아르의 방을 보기 전에 분수가 있는 뜰을 지났는데 이곳은 한 가운데 분수가 있고 양옆으로 식물들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일순 처음 들어올 때 이곳이 돌산이었음을 떠올리고 도대체 이 물이 어디서 왔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곧 놀라운 해설이 들려왔다.
즉 이 알함브라궁 건축 당시 이슬람의 기술자들이 일 년 동안의 강수량을 측정해 이를 보관하는 수로를 만들고 이 수로를 통해 나자리궁을 땅위의 궁전이 아니라 물위의 궁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1000년 전 수로를 지금도 쓰고 있는데 당시 지금의 다마스커스에서 온 기술자들이 시조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이드는 이 수로건설에 중국의 건축기술을 차용했다고 들려주었다.
동서 문명 교류의 현장을 이곳에서 목격한 것이다.
분수를 지나(기타곡 알함브라의 추억은 이분수의 물 떨어지는 소리에서 착상한 것이라고 함) 알함브라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나자리궁의 중심부 코마레스로 향했다.
1200년 전에 지어진 이 나자리(Nazaries)궁은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건축양식으로 왕의 집무실이자 주거공간이다.
코마레스궁 한가운데 자리한 아라야네스안뜰을 가득채운 연못은 너무도 아름다웠는데 물위로 탑이 비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다시 그 유명한 사자중정으로 향했는데 화려한 이슬람 문양을 뒤집어쓴 기둥 사이로 12마리의 사자가 분수를 이고 있었다.
술탄의 집무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 사자석상은 스페인의 국보로 지정돼 있는데 사자분수의 연원은 유태인들의 물시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 서예가 한현숙 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이 라이온의 안뜰에는 19세기 미국인 작가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이야기'를 집필한 방이 있는데 그는 이 알함브라에 매혹돼 이곳에서 이 책을 써 세계적으로 알함브라의 성가를 높였다.
한편 이 나자리궁의 천장은 8200개의 나무로 짜 맞추었다고 하는데 천장에는 별이 수놓아져 있다하는데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어빙이 거처했다는 방을 지나 함맘이라는 사우나실을 거쳐 '두 자매의 방'으로 불리는 공간으로 향했는데 술탄의 두 딸이 살았던 방이라고 한다.
이 두 자매의 방 천장에는 모하메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을 받는 모습을 경건하고도 아름답게 장식해놓았다는데 당시 이슬람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메수아르, 코마레스, 라이온궁으로 구성된 나자리궁은 인류건축술의 백미로 그저 탄성만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제한된 일정으로 알함브라궁도 다 돌아보지 못하고 들어왔던 입구로 되돌아왔는데 마침 우물과 비슷한 음수대가 있었다.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이곳에서 갈증을 달래면서 알함브라궁을 되돌아보았다.
멕시코의 한 비평가가 그의 시에서 “그라나다에서 장님이 되는 것만큼 더 큰 형벌은 없다”고 했다던가.
알함브라궁을 보지 못한다면 정말 대단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마간산 식으로 본 알함브라는 이슬람문명을 아주 잘 대변해주는 건축물이라는 느낌이었으나 한편에서는 기대 만큼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품평도 나왔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배경으로 석양에 비친 알함브라궁의 매력적인 실제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기타선율에 각인된 알함브라는 그렇게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다./글·사진=조성남 주필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