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한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19751225가 실내 전시장과 야외를 배경으로 자연환경을 이용한 환경작품과 평면작품을 아우르는 전투적이고 실험성 짙은 예술작업을 할 무렵 1978년 목원대학교 선·후배를 중심으로 한 미술인 12명에 의해 '대전 78세대'라고 하는 토털 아트 그룹이 태동되었다.
대전 78세대 활동은 설치미술이나 행위 미술을 진지하게 실험할 수 있는 물꼬를 텄는데, AG 그룹 멤버였던 김한(당시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과 우리나라 1세대 로지컬-이벤트 창시자인 이건용, 해프너였던 성능경의 출현과 아울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복영의 채널이 대전 78세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대전 78세대 창립전 참여 작가는 강정헌, 김익규, 김철겸, 송일영, 신현태, 안치인, 이종봉, 장금자, 정상희, 지석철, 최덕희, 최병규였으며, 해가 바뀌면서 이두한, 이재우, 김영호, 홍현표, 임근우, 진정식 등이 동참하게 된다.
당시 대전 78세대 그룹을 형성한 주된 멤버들은 목원대 75학번이었다.
75학번 기수는 목원대 3회이지만 1, 2회의 30명 정원 중에서 10여 명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0여 명 학생 중에서도 절반 정도는 군에서 제대한 복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목원대에서 학창시절을 시작한 사람은 10명 이하인 소수의 인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인원으로 대전 78세대 그룹의 태동을 장려하기에 빈약한 상황이었다.
목원대 초창기 당시 미술교육과 교수로는 윤영자와 김한이 있었다.
▲ 윤영자 교수 |
즉 공모전을 출품하면서 작품 완성도를 높이고 개인의 예술가적 입지를 강화해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리라는 논리였다.
반면에 서양화를 맡은 김한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 성향도 매우 파쇼적이면서 기존의 체제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교육자였다.
▲ 김한 교수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가가 공모전 등에서 상을 받으면 오히려 교만해지고, 너무 일찍 한 성향으로 작품이 고착되기 때문에 미래의 다양한 창의적 발상을 스스로 매몰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공모전에 매달리는 것을 자제시키는 입장이었다.(김한 교수는 2008년 5월 15일 별세)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두 가지 방법을 혼합하기도 하고 한 가지 방법만 선택하여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타진해 보고 있지 않은가!
이 중 김한 교수의 방법론을 보자면, 순수예술의 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예술성은 높다 할지라도 개인 생활의 고난과 험난함 때문에 중도하차할 확률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김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 전반적인 고민과 성찰을 강조했는데, 특히 서구적 사고나 표현방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동서양의 차이에 대해 강의했다.
그러나 윤영자의 방법론은 모방론에 가까웠다.
그래서 모방을 통한 작업적 모색과 함께 이에 수반되는 고민에 따른 탈출로를 찾는 학생들의 분주함이 많았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대전 78세대의 주류들은 김한 교수의 방법론을 주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윤영자와 김한 교수 모두 다 학생들에게 열정적인 예술 활동을 요구하면서도 서로 상반된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갈등은 다분히 있었지만, 오히려 짧은 4년의 학창시절에 폭넓은 미술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도 많았다고 강정헌은 해석하고 있다.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