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류가 자기혈통의 뿌리를 기억하고 같은 조상에서 나온 가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이 성이다. 성씨는 성(姓)과 씨(氏)가 합쳐진 용어로 성은 혈족집단을 말하며 씨는 사는 지역, 곧 본관을 의미한다. 성이 아버지 핏줄을 나타내며 시간에 따른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조상이 살았던 거주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공간에 따른 연속성이 크다. 따라서 성이 같고 본관이 같다는 두 조건이 성립될 때에만 한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 안동김씨 성보 |
우리나라 성씨의 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으로 기록되었고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문헌에 있는 성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다. 1960년 실시한 인구조사에는 258성으로 나타났으나 현재에는 귀화하여 창씨를 한 사람이 늘어 2000년 기준 280개 성씨가 있다.
2008년 효문화뿌리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됐던 하일(로버트 할리)씨는 미국인으로 한국에 귀화해 부산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독일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해 첫 공기업 사장에 오른 이참(이한우)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독일이씨의 시조다.
이러한 성씨관계를 밝힌 것이 족보인데 족보가 처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곳은 고대 지중해 연안이었다고 한다. 주로 수도사들이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그 시초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부터 집안의 계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고 송대와 원대에 걸쳐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중국 북경도서관에 있는 가정각본(嘉靖刻本)인데 명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 우리나라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족보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조상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가계전승의 기록은 존재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첫머리에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주몽·동명왕)의 신비로운 출생과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추모왕에서부터 17대 광개토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실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성봉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건국신화와 왕실계보는 고구려국가의 신성함과 왕실의 존엄성을 자랑하고 추모왕의 후예인 광개토대왕이 특권적 신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처럼 고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들 혈통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과시하기 위한 가계가 전승되다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처럼 일정한 시점에 문자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족보박물관 3전시실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동명왕)의 신비로운 출생과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소개한 한국족보박물관 심민호 학예연구사는 “추모왕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해 태양신의 자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 광개토왕릉비에 새겨진 계보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계전승기록”이라고 의미를 담았다.
고려시대에도 일정한 형태를 갖춘 가계기록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물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본격적으로 가보(家譜)를 갖추게 된 것은 1423년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발행한 영락보(永譜)인데 서문(序文)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문헌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족보는 성종 때인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다. 목판으로 찍어낸 3권짜리 이 족보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서울대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돼 있다. 혈통의 귀천과 집안의 위상이 높고 낮음이 신분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었던 조선 초기 족보(15세기 중엽)의 특징은 한 집안의 업적을 확대한 계보이며 외손과 친손을 구별 짓지 않았으며 자녀를 태어난 순서에 따라 수록했다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족보 발간이 활발해졌는데 이 시기 족보는 아버지 쪽 핏줄을 위주로 하며 어머니 쪽은 4대로 한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녀를 싣는 순서도 출생순서가 아니라 남자를 앞에, 여자를 뒤에 싣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점차 서자서녀를 이름 위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출계(出系·양자를 보냄)에 대한 기록도 구체적으로 수록했고 이름에 항렬자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족보에서 파(派)가 출현하며 파조를 중심으로 하는 파보의 간행도 시작된다. 조선후기에는 씨족의 분화현상과 조상의 관직에 대한 자랑 등이 결합하면서 파(派)속에서도 다시 파(派)가 갈리는 현상도 발생했다. 이 시기에 '대동보(大同譜)'나 '세보(世譜)' 명칭의 족보들 중에서도 실질적으로는 파보가 상당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족보 간행이 줄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전에 비해 왕성한 족보 발간이 이뤄졌다.
▲ 현존 最古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사진제공=규장각> |
그러나 조선의 족보와 성씨체계의 근본을 위협한 것이 창씨개명이다. 일제는 1939년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해 1940년 '씨(氏)'를 결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은 “족보 발행이 허가제인 당시 상황에서 개명된 이름을 무시하고 본래 것을 넣어 발간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창씨나 개씨를 한 성명을 족보에 올릴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 소장에 따르면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족보를 간행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1940년에 61건, 1941년 19건, 1942년 14건, 1943년 3건, 1944년 1건, 1945년 1건이어서 1920~1930년대 왕성했던 족보 출간사업은 창씨개명 후 거의 중단된 모습을 보인다. 정 소장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인적·물적 수탈이 가중되다보니 문중에서 족보를 발간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도 족보의 맥은 이어져 현재 어느 집안이든 족보가 없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성봉현 연구원은 “사회문화의 변천에 따라 족보의 간행방식도 다양화해 한글세대를 위해 성명을 국한문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딸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위만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딸의 이름을 표제명으로 하고 사위명을 부기한 뒤 이어 외손의 성명이 모두 실리기도 한다”면서 “최근에는 문헌으로 된 족보의 발간과 동시에 전자족보 내지는 인터넷족보의 발간도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글=임연희·동영상=금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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