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前 중도일보 주필 |
그러나 여기 기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지도층과 생활이 안정된 공직사회의 비리가 더 심각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에 속한다고 큰 소리치지만 우리 사회는 못살 때보다 요즘의 비리가 더하다니 분명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부산저축은행 사건, 재벌들의 탈세와 대학가의 부정, 경찰관의 뇌물수수 등은 더없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젠 은행감독원과 감사원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에 직면해 있다. 정치인들의 비리, 총리·장관 임명 때 치르는 청문회를 보면 청렴한 인사란 이 땅에 없는 듯하다.
땅 투기, 부정입학, 이중국적 시비, 병역비리 등으로 얼룩진 인물 투성이다. 지도층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를 외치고 학교에선 앵무새처럼 '정의', '도의', '양심'을 합창하지만, 그것은 표방이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불연듯이 손창섭의 콩트가 떠오른다. 만주에서 있었던 일이라 했다. 한 아편 중독자가 길을 가는데 저만치에 선배 아편환자가 나자빠져 있다. 콧김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랜듯하다. 이때다 싶어 그 중독자는 죽은 자의 겉옷과 내복을 벗겨 챙긴다.
여기서 짐짓 뒤를 돌아보니 죽은 자의 알몸이 마음에 걸린다. 그 알몸보다 더욱 눈을 끄는 것은 축 늘어진 고추(남근)였다. 그는 바지로 죽은 자의 고추를 덮어주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음이 개운치 않아 다시 다가가 그 바지를 거둬들인다. 그것을 갖고 가면 아편 한 두 대는 더 맞을 수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이때 주위를 살피다 발치에 깨어진 사금파리가 있는 걸 발견, 그것으로 죽은 자의 고추를 덮어주고 발길을 옮겼다는 내용이다. 저속한 내용 같지만 죽음을 앞둔 아편쟁이의 한 가닥 '양심'을 그려낸 명작이다.
그래서 찡하니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 오늘날 사건사고를 저지른 자들은 콩트 속의 아편쟁이처럼 짐짓 고뇌라도 체험했는가를 묻고 싶다. 이왕 콩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편만 더 소개를 하자. 어느 명사의 장례식 장면을 다룬 작품이다.
명성에 걸맞게 영결식은 성대히 거행되는데 조사에 이르러 장내는 더욱 숙연해진다. 고인의 화려한 경력소개를 하던 사회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고인은 불우한 이웃을 도왔고 학교도 세웠으며 인품 예절, 도의 면에서 본보기가 되는 그런 인물이었다고 추켜세웠다.
영결식에 이어 영구차는 거리제 장소로 이동했다. 고인이 내왕하던 거리에서 노제(祭)를 지내는 것이다. 이때 맞은 편 담장 너머로 이쪽을 향해 흐느끼는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등에 업힌 꼬마를 다독거리며 '아가야! 마지막 가는 아빠 모습이다'라며 흐느낀다.
그 말속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그 꼬마는 사생아일 수 있고 따라서 불륜의 산물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손창섭…. 그는 1950~1960년대에 걸쳐 한국문단을 주름잡은 소설가였다. 초기에는 사연기(死緣記), 혈서등으로 출발, 장편소설을 계속 내놓았다.
특히 그는 심문소설로 스타덤에 오른 인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손창섭의 소설 때문에 신문을 구독한다는 평이 나돌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대하물로는 '비오는 날', '잉여인간', '설중행' 등 모두가 명작이었다. 그의 문장은 더없이 간결해서 헤밍웨이의 문체를 닮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50년대와 60년대에 독자를 매료시키며 소설을 썼던 손창섭…. 그의 단편소설 혈서를 펼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혈서를 쓴다, 혈서를 쓴다.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쓴다.'
사연기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암울했던 그 시대 독자에게 시니컬한 웃음과 위안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70년대 일본인 아내를 찾아 현해탄을 건너간 뒤 소식을 끊었다. 일본의 신문, 대중잡지, 어디에도 그의 글은 보이지 않았는데 수년 전 사망했다는 풍문을 접한 게 전부였다.
손창섭…. 첫 번째 콩트는 아편중독자의 인간성과 '양심'을 다룬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콩트는 명사를 과대 포장하는 세속을 꼬집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비록 아편쟁이의 행태라 할지라도 그 알량한 양심을 한 번쯤 반추해보는 게 어떨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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