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스페인 세비야의 스페인광장. 그 이름에 걸맞게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이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
미국인이 가장 가고 싶은 나라가 스페인이다. 6000만명 가까운 세계의 관광객이 스페인에 오는 것도 남부 안달루시아지방의 해변가를 비롯한 휴양지를 선호하는 계층이 많은 데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로마시대를 비롯한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 그리고 근현대의 생활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다양한 문명의 공존현장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이번 여행에서 느낀 소감이다.
실제로 마드리드를 비롯한 세비야, 톨레도는 물론 바르셀로나,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등의 도시에는 가톨릭 성지순례단을 비롯한 중동의 이슬람교도로 보이는 순례객의 행렬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만일 스페인에서 기독교세력이 이슬람문명을 말살시켰다면 오늘날과 같은 스페인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지금처럼 많은 해외 관광객이 몰려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세이슬람문명과 중세가톨릭문명이 공존하는 인류문명의 현장이기에 세계인이 스페인을 주목하게 되고 발걸음을 디디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를 돌아보면서 도대체 인류에게 문명이란 무엇인지, 또 왜 인류는 서로 다른 문명을 만들고 충돌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지 등을 자문자답해 보았으나 속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인류사는 문명사며 인류의 발전을 문명 아닌 다른 용어로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고대유적의 화려함을 대하면서 인류가 과연 발전해온 것인지 한편으로 회의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5000년 문명사는 이질문명 간의 만남과 나눔의 역사, 즉 교류의 역사라는 정수일 박사의 견해에 공감을 표하게 되었다.
▲ 스페인 그라나다 시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
각설하고 스페인은 유럽의 최남단에 속해있으면서 아프리카대륙과 맞닿아 있어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이 서로 이곳을 차지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아울러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일찍부터 온갖 종족이 거주하면서 다양한 문화가 상륙했고, 지중해를 끼고 있어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의 지배를 거쳐 로마시대 700년, 이슬람세력 지배 800년 그리고 대항해시대 이후의 가톨릭 국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실로 유럽과 중근동의 문명이 꽃피게 되었고 이런 이질적인 문화가 오늘날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스페인이 이처럼 다양한 문명을 지닐 수 있었던 이면에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과 1930년대의 스페인내전으로 곳곳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스페인은 1·2차 대전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써 전쟁의 포화를 비켜나갔고, 그 덕분에 역사의 흔적과 문화적 산물을 지켜낼 수 있었다.
'유네스코와 유산' 사이트에 따르면 2010년 8월 현재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은 187개국이며 세계유산은 전 세계 151개국이 보유하고 있는 911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문화유산이 704점으로 가장 많고 자연유산이 180점, 복합유산이 27점 순이다.
잘 아는 것처럼 세계유산은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돼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될 때에만 지정될 수 있는 세계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참고로 세계문화유산1호는 그리스 파르테논신전이다.)
이 사이트에 등재된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은 모두 42건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필자가 스페인여행에서 들은 설명으로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으며 그 수도 50건에서 1건 빠지는 49건이라고 현지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다. 정확한 수는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은 그 하나하나가 가히 볼거리며 놀라운 충격을 준다.
필자가 돌아본 세비야의 대성당을 비롯한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모스크)와 주변의 유대인거리와 로마다리, 화가 엘 그레꼬가 살았던 고도(古都) 톨레도,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가 가우디가 만든 구엘공원 등은 하나같이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 서양화가 서재흥 作 스페인 사라고사 '아름다운 꽃길' |
유적도 유적이지만, 그 시대의 여러 흔적 또한 도시에 남아 있었다. 세월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오랜 역사의 시간들이 유적은 물론 거리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그 오래된 시절의 주택에서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20년, 30년 된 건물이 쉽사리 철거되는 우리네 현실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이런 풍경이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충격과 함께 이들 세계문화유산을 둘러보면서 인류가 쌓아온 이 문명은 정말 제대로 보존돼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현장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어떤 교훈 같은 것들을 느끼고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거대하고도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게 했을까.
대평원을 끼고 있는 스페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로마인은 그들의 통치를 영속시키기 위해, 이슬람세력과 가톨릭 또한 그들의 종교와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 이 같은 건축물을 세웠으며 지금까지 이를 공존케 한 포용력이 스페인의 독특한 문화적 탁월함으로 이어졌다는 상념에 젖어보았다.
바르셀로나에서 본 가우디대성당과 구엘공원은 현대에 와서 지은 건축물이나 이 또한 가우디라는 현대건축가의 섬세한 감각이 세계인이 주목하는 건축물로 인정받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인류사는 문명사란 헌팅턴의 말을 되뇌이며 필자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스페인 문화의 다양함과 깊은 맛에 급속하게 빨려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명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 아울러 정수일 박사의 지적대로 인류의 문명은 서로 교류를 통해 더욱 풍부해지고 거기서 또 다른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아니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문화는 어떤 비전을 갖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 착잡한 상념 또한 떠나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글=조성남·사진=황길연 중구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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